이성심 교무
이성심 교무

[원불교신문=이성심 교무] 햇살이 따뜻한 초겨울 아침이다. 하루가 조용히 밝았다 가만히 어두워진다. ‘날마다’라는 말에는 새로움 대신 일상성이 더 깊이 자리한다. 그래서 새롭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평범함으로 늘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교당 주변에서 공사(工事)하는 아침은 좀 다르다. 2년 전, 교당 앞 건물에 24시 동물병원이 들어온다고 내부 공사로 기계음이 요란했다. 

또 건물 뒤쪽 도로에서는 어린이 보호 도로를 새로 한다고 길을 긁고 걷어 내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쿵 쿵 울리는 소리에 교당 건물도 덩달아 흔들리고, 나도 온 신경이 곤두섰었다. 심신작용도 요란했다. 소리 없는 새것도 있다지만, 내 곁에 오는 새것은 참 요란하다고 인식했다. 때론 귀에 거슬리며 온 지축을 흔들어 짜증도 났다. 지난달과 이달, 교당 건물 2층 공사를 하는 동안이 그랬다. 하지만 새로워지기 위한 큰 소리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알았다. ‘주변이 골라지기 위한 울림이다’는 감상을 얻고부터였다. 새로워지기 위한 시간이니 모든 것을 인내하며 돌리는 마음으로 취사를 할 수 있었다. 
천지자연도 천둥과 번개를 치며 골라 맞게 하고 새로운 날로 거듭난다. 분명, 새롭게 거듭나는 데에는 큰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이것을 거부하면 변화는 가져올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내 몸도 새로워지거나 거듭나기 위해 한 번씩 아픔을 맞아야 하고, 아이들도 크려고 한 번씩 병치레를 하지 않는가. 

요즘 우리 주변에도 한 해 마감에 앞서 지자체마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도심의 공사다. 노후화 된 보도블럭을 교체해 새롭게 정돈하는 곳이 많아진다. 도로 좌·우회전 유도선도 선명한 분홍·노란색으로 하니 산뜻하다. 사건 사고를 줄이기 위한 지자체의 노력이 돋보인다. 

어쩌면 현실에서 소리 없는 새로움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내가 인지할 수 없는 너무 큰 소리이거나, 또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할 뿐이다. 대산종사는 “밖으로 어떠한 소리와 경계와 시비 등도 다 놓아 버리는 살아 있는 선을 해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무시선 무처선 공부의 활용이다. 고스란히 모든 소리를 인지하며 ‘소리가 나네’ ‘우리 교당 앞뒤로 좋아지겠네’ 하며 내 할 일로 관심과 집중선을 행해 본다. 거슬리게 들리던 소리들도 활기찬 기계음으로 들린다. 그들은 큰 소리를 내며 일을 하고 새롭게 변화를 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그저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그들의 수고로움에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한 겨울이 오기 전, 교당 인근 작은 공원에도 도심 물순환 공사 중이다. 열섬 현상을 막기 위함이다. 이렇듯 공공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 갖가지 변화를 시도하는 지자체를 보며 우리 교단 역시 새로워지려는 태동을 감지해 본다. 교단혁신을 위한 설문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혁신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기술되지 않았지만, 그 내용들은 짐작이 가는 사항들이다. 

새롭게 혁신하자는 외침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새로운 혁신의 세부 내용이 발표되었을 때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나도 혁신의 대상이 되었을 때 변화를 감수하고 기꺼이 응하느냐이다. 가령, 시내권 교화 활성화를 위해 교당 재편을 한다면 우리교당 교도나 교무가 응당 그 정책을 수용하고 그렇게 해 봅시다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교단혁신이 어디 교정원에 있거나 수위단회에 있거나 하는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교단혁신의 주체가 아니라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워지기 위한 교단혁신은 나와 우리 교당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 

새로운 교단혁신은 위로부터 변화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공사(公事),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해 내야 하는 교단 공사임을 인지해야 한다.

/둔산교당

[2021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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