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1948년 1월 30일 새벽 5시 30분경, 간디는 아침 기도회에 참석하려고 집을 나섰다. 그는 그날 파키스탄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 기도회에 가는 길에 청년 한 사람이 길을 막고 권총을 꺼내어 세 발을 간디의 가슴에 쐈다. 그는 즉사했다. 암살 목격자들에 따르면 간디를 쏘기 전 암살자는 두 손을 모아 간디에게 존경을 표했으며, 총을 쏜 후에는 총을 든 손을 허공으로 올리면서 “경찰”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고드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암살자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내가 간디를 죽이면 나는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명예를 모두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간디가 사라지면 분명히 인도의 정치는 현실적인 것이 되어서, 응징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군대를 보유하며 강력해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간디가 암살당하자 근대 국가로서 인도 건설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고, 암살자 고드세의 기대는 예상대로 이뤄졌다. 근대 국가 인도의 건설을 위해 이상주의자 간디는 죽어줘야만 했던 것이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국가’에 의해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질문화를 뿌리치고 세상(사회) 밖으로 나가 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과거의 성인들이라고 하는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감탄과 존경의 눈길을 보내는 현상을 ‘포기의 역설’이라고 한다. 세계 역사에서 암살을 당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유명해진 사람들이 많다. 간디도 백범 김구도 수동적이기는 했지만 ‘포기의 역설’이 된 경우다. 간디는 훌륭한 실천가이고 운동가였지만, 살아있었다면 과연 정치를 잘해서 독립 연방공화국 인도의 수많은 난제를 잘 헤쳐나갔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간디는 하나의 관점으로 단정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인 인물이다. 마치 인도의 사회현상처럼.
간디는 카스트 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카스트가 본래의 장점을 잃어버리고 왜곡되어 인간착취의 굴레로 작동하고 있으니, 그런 부분만 개선하고 카스트 특유의 철저한 분업화를 토대로 상호 호혜성에 따라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는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의 합의 민주주의를 바란 것이 아니라 힌두 신화인 『라마야나』의 군주인 라마처럼 지도자가 선정을 베푸는 가장(家長)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나 다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지만, 또 다른 면의 간디도 있다. 간디의 전기를 준비하던 미국인 기자가 간디에게, “무기와 군대를 반대한다고 하셨는데 만일 인도가 독립이 되면 그 군대와 무기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군대는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은 밭에 가서 일하고 무기들은 바다에 처넣어야지요. 우리는 비폭력적인 국민이니까요.” 그리고 독립이 되고 나서 파키스탄이 까쉬미르를 공격했을 때 인도의 국부 격인 간디는 파키스탄의 공격을 위해 집 위를 날아가는 인도 공군소속의 비행기 3대를 향해 정원으로 나와서 축복을 보냈다고 한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 이름을 『진리와의 실험들』이라고 했다. 얼른 들으면 진리와 갈등을 일으키고 무엇을 찾으려고 하였나보다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진리가 꽉 막혀버린 사고의 통로를 터트려 보려고 궁굴리고 실험한다고 되는 일일까.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1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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