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 교무
박대성 교무

[원불교신문=박대성 교무] 옛 사람들은 명상의 깊이가 무르익으면 생사(生死)를 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을 내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우주를 살 수 있을 만큼의 금은보화가 주어진다고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자신의 탐욕과 만날 가능성만 더 커질 뿐이다. 육신을 유지하는 생명의 수량이 늘어난다고 생사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생에 여유를 가질 수 있겠지만, 죽음의 공포는 시시각각 우리를 덮칠 것이다.

생사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삶의 어떤 부침(浮沈) 속에서 비굴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해도 당당하고 흔들리지 않는 본래 평정(平靜)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늘 실존적 불안에 떨고 있다. 죽음 앞에서 벌어지는 우울과 불안은 극도에 들어가 우리를 삶의 노예로 만들기 십상이다.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지옥’에는 신의 의도에 따라 지옥에 떨어진다고 고지(告知)를 받게 된 인간들이 죽음 앞에 얼마나 무기력하고 공포 진저리를 치게 되는지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삶과 죽음을 개별적 상태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주제는 감당하지 못할 절망으로 마음속에 자리할 것이다. 하지만 선을 통해 이 세상은 오고 가는 이치로 건설돼 있음을 곧바로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관념적 이해에 멈춰있던 생사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생사는 단절의 세계가 아니라 연속되고 순환하는 구조로 맞물려 돌아간다.

이를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의 생사는 비하건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과 같고,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는 것과도 같다(『대종경』천도품 8장)”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이 몸을 ‘나’라고 믿고 집착하게 된다면 이를 유지하고 있는 ‘삶’이라는 현재의 영역은 놓칠 수 없는 강력한 애착의 대상이 될 것이다. 동시에 이 몸을 무너뜨릴 죽음이라는 영역은 피하고 싶은 강력한 금기의 대상이 된다. 생사에 대한 집착을 끊고 이것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학문이나 지식이 아닌 벼락과 같은 강력한 지혜의 힘이 필요하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산스크리트 어(語) ‘와즈라(Vajra)’를 해석한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단단한 광물인 ‘다이아몬드’와 신화에서 강력한 권위의 상징으로 쓰이는 ‘번개’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진 단어이다. 우리가 생(生)과 사(死)의 집착을 놓아버리기 위해서 모든 것이 공(空) 하다는 진리를 휘둘러 마음속의 분별, 집착, 번뇌 등을 부숴버려야 한다. 그런 뒤에야 미련 없이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 

‘생사에 자유를 얻는다’는 표현 자체가 이것이 둘이 아니라는 원리를 투철히 체득한다는 의미이며 그 원동력은 곧 선 명상을 통해 마련할 수 있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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