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선 영산선학대 교무

김인선 영산선학대 교무
김인선 영산선학대 교무

[원불교신문=김인선 교무] 제 침대 머리맡에는 2장의 사진이 모셔져 있습니다. 한 장은 강릉 앞바다에서 아버지 품에 안겨 어머니와 함께 어렸을 적 찍은 유일한 기념사진 1장과 20여 년 전, 학부시절 뜻밖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 추천교무님의 사진입니다.
두 장의 사진은 저에게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빛 바랄까 낡을까, 혹여 잃어버릴까, 수납함 속에 간직해오다 영산으로 온 후 침대 머리맡에 모시게 됐습니다. 아버님과 추천교무님의 육신은 비록 함께하진 못하지만 제 마음 한 곳에 정신적, 육신적 부모님으로 모시며 닮아가고픈 마음으로 종종 사진 속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모시고 살아가는가
오늘은 교도님들과 함께 모시는 마음을 주제로 나는 현재 무엇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모시며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모신다는 뜻은 웃어른 또는 존경하는 이를 가까이에서 받든다는 뜻입니다. 받든다는 것은 공경하며 모시다. 소중히 대하다. 가르침이나 명령, 의도 등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으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즉, 모신다는 것은 무엇을 대하든 공경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대하며 받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 영산선학대학교 곳곳에는 일원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각전을 비롯해 강의실, 식당, 서원관 등 발길이 닿는 곳에는 법신불 일원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저는 일원상을 향해 합장 인사를 올릴 때, 내 안에 갊아 있는 일원상 부처님이 잘 계시는지? 저 법신불 일원상과 지금 이 순간! 내 안의 일원상과 하나인가? 둘인가? 종종 물어보며 그 순간 잠시 마음을 멈춰봅니다.

일원상을 모시는 이유
법신불 일원상을 모시는 이유는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장에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법신불의 근본을 말하자면 언어와 명상이 끊어진 자리며 그 실체를 말하자면 우주 만유가 모두 법신불 아님이 없으므로, 따로이 일원상을 봉안하지 아니하여도 법신불의 진리는 항상 여여히 있으나, 우리 일반 대중에 있어서는 신앙의 대상을 보이지 아니하면 마음의 귀의처와 수행의 표준을 알기가 어려우며, 설령 안다 할지라도 마음 대조에 때때로 그 표준을 잃기가 쉬우므로, 대종사께서 교당이나 가정을 막론하고 법신불의 상징인 이 일원상을 봉안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받들게 하신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저 표준의 일원상을 봉안하고 신앙함으로 인하여 참 일원상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며, 일원의 참된 성품을 지키고 일원의 원만한 마음을 실행하여, 일원상의 진리와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합치함으로써 다같이 한량없는 복락과 한량없는 지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니라” 

일원상을 모시는 방법
법신불 일원상을 모신다는 것은 내 삶 속에서 참 일원상을 발견하자는 것이요, 내 삶 속에서 일원의 참된 성품을 지키고 일원의 원만한 마음을 실행하자는 것이며, 내 삶 속에서 일원상의 진리와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합치함으로써 다같이 한량없는 복락과 한량없는 지혜의 주인공이 되자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서 참 일원상을 발견하자는 것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이 저 일원상과 똑같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해가자는 스승님의 간절한 염원과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대종사님은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서 각자의 마음을 알고,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고,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각자에게 갊아 있는 일원상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시며, 우리 각자의 마음에도 저 법신불 일원상이 그대로 갊아 있으니 믿는 사람부터 각자 마음 안에 모시고 신앙, 수행의 길로 나아가게 밝혀주셨습니다.
 

시불·생불·활불로 살아나려면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는 마음’을 
챙기고 챙기고 또 챙겨야

일원상과 나의 관계
일원상과 나는 어떠한 관계이기에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게 하셨을까요? 

저는 요즘 원불교 성가 중에 ‘저희들의 이 가정에’ 성가를 즐겨 부릅니다. 가사 가운데 “저희들의 마음마다 법신불을 모십니다. 생각생각 걸음걸음 법신불을 모십니다. 저희 모두 새 맘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평온하고 행복함이 넘쳐나게 하소서.” 

이 성가를 부르면 제 마음은 어느새 탐·진·치심이 녹아나고, 말이 묵묵해지며, 마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해집니다. 성가를 부를 때도, 운전할 때도, 혼자 산책하거나 단순한 작업을 할 때면 내가 들어서서 운전하고, 내가 들어서서 걷고, 내가 들어서서 작업하는 게 아닌 일원상 진리가 내 몸을 통해 움직이고 있구나! 이때가 바로 유무 초월한 자리요, 마음의 거래 없는 것이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구나! 이를 신앙, 수행해 가는 것이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얼마 전 한 교무님과 통화 하던 중 “인선교무는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하고 있어? 일원상을 기준하고 있는지, 아니면 인선교무의 그 자존심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지, 어떠한 마음을 기준으로 하며 살고 있어? 그 모시는 마음의 출발점이 다르면 결국 수행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무엇을 모시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순간 제 마음에 표준을 잃고 있었음을 알게 됐고, 부끄러운 마음과 지금이라도 다시 마음을 챙길 수 있게 해 준 교무님께 감사한 마음에 짧은 심고를 올렸습니다.

우리는 시비이해의 일속에서 마음의 방향과 표준을 잃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땐 잠시 그 마음을 멈추고, 마음 가운데 무엇을 잡고 있는지, 무엇을 기준하고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면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내 마음에도 저 법신불 일원상과 같이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가 있다 하셨으니, 그 순간 그 한 마음을 밝히면 우리도 일원상 진리가 바로 내 마음에서 드러남을 보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시불·생불·활불이 되자

대산종사 서성로교당 봉불식에서 “우리가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하는 것은 시불(侍佛)·생불(生佛)·활불(活佛)의 뜻이 있나니, 시불을 하자는 것은 자나 깨나 진리와 부처님과 스승님을 모시고 닮아가자는 것이요, 생불이 되자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천진불을 회복해 완전한 권리와 원만한 능력을 갖춘 부처가 되자는 것이며, 활불이 되자는 것은 내 가정과 내 이웃과 내 국가를 비롯한 시방세계 일체 생령을 구원하는 산부처가 되자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법신불을 봉안하는 것은 결국 시불·생불·활불을 잘 모시자는 것입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이곳,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곳에서부터 시불·생불·활불로 살아나려면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는 마음’을 챙기고 챙기고 또 챙겨야 합니다. 

내 안에 일원상 부처님을 잘 모셔야
좌산상사께서는 “모시는 마음은 진실한 마음이요, 공경의 마음이요, 겸손의 마음이요, 복의 마음이요, 불공의 마음이요, 법받는 마음”이라 하셨습니다. 

모시는 마음은 이미 우리 안에 갊아있습니다. 다만 갖춰져 있는 그 마음을 때에 맞게 잘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모시는 마음은 외부 주변의 대상만을 모시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갊아있는 일원상 부처님을 잘 모실 줄 알아야 온전한 모시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끝으로 『대종경』 신성품 8장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삼보(三寶)를 신앙하는 데에도 타력신과 자력신의 두 가지가 있나니, 타력신은 사실로 나타난 불(佛)과 법(法)과 승(僧)을 사실적으로 믿고 받드는 것이요, 자력신은 자성 가운데 불과 법과 승을 발견하여 안으로 믿고 수행함이라, 이 두 가지는 서로 근본이 되므로 자력과 타력의 신앙을 아울러 나가야 하나, 공부가 구경처에 이르고 보면 자타의 계한이 없이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한 가지 삼보로 화하나니라.”

/영산선학대학교

[2021년 1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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