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원불교를 알기 전, 몇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 나라에 가는데 왜 오직 예수를 통해야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단지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과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한 죄인들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은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생각됐다. 

나이가 들어 원불교를 알고 난 뒤 그 말의 참뜻을 해결했다. 하지만, 맹목적인 신앙이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게 하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천시대 불교에서도 법을 전하기 위해,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그 법을 받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전쟁을 했는가.

후천개벽의 시대에 법을 편 대종사는 한 사람에게만 법을 전하는 단전이 아닌 공전을 주장했다. 열반 전 전법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하던 게송을, 대종사는 열반하기 2년 반 전에 발표해 대중이 게송을 받들어 연마하게 했고, 또한 교서들을 끊임없이 재정비해 대중이 다 같이 쉬운 우리 말로 법을 받아 신앙하고 수행하게 했다.

‘부촉품4’에서 대종사는 ‘나의 법은 신성 있고 공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 가도록 전하였다’고 했다. 어느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법을 전해 그 사람만 법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를 통해서만 법을 받을 수 있다거나, 그를 통해서만 낙원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신성있고 공심있는 누구든지 자기가 이 법으로 몸과 마음을 교법화해 사용하면 모두 낙원세상의 주인이 된다고 했다. 자기 스승만을 강조하고, 그 스승이 아니면 법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대종사가 새 시대에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고자 법을 펴고 공전으로 전한 뜻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무리의 특징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에 대한 진리 신앙을 강조하는 것 보다,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신심과 자기 무리를 위한 공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종사가 말한 신성과 공심이 겨우 한두 ‘사람’에 대한 신성과 소속집단을 위한 정도의 공심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는 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하는 신성과 그를 바탕한 일체생령을 위한 공심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시 개교의 동기로 돌아가자. 대종사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원불교를 열었던 그 뜻으로 육근을 사용하자. 

눈 한 번 감았다 뜰 때, 한 생각 일어날 때와 혹은 일으킬 때,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내 안의 중생과 육근으로 들어오는 모든 중생을 낙원으로 인도하리라는 간절함으로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하자.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1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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