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교장 / 한겨레중고등학교
이진희 교장 / 한겨레중고등학교

[원불교신문=이진희 교장]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 때가 있다. 토닥토닥 진심 어린 위로가 절실할 때도 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많다. 

한파가 몰아치는 이 겨울, 없는 형편에 날씨마저 추우니 빈 지갑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못난 마음이 서러워져서. 코로나 19로 인해 장사도 안 되는데, 겁이 나서 열어보지 못한 우편함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쌓여 있는 세금고지서에 공과금고지서. ‘얼마간만 참으면 되겠지’ 하며 여태 버텨왔건만,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적자 가계부는 더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곳도 없다. 

위로가 필요한 이유가 어디 그것뿐이랴? 건강검진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갔더니 왜 혼자 왔냐고 묻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래도 착한 암, 거북이 느림보 암이라고, 의사는 애써 위로하려 하지만 이미 내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학교는 이미 졸업한 지 여러 해 지났건만, 취업은 산 넘어 또 넘어야 할 더 험난한 산일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최선을 다했건만 하늘도 무심하다. 합격 통지를 손꼽아 기다릴 늙으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서 긴 한숨만 나온다. ‘하면 된다’라는 듣기 좋은 문구에 속아 스스로에게 덧없이 희망 고문을 한 자신이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이밀었건만, 초라한 취업 성적표를 마주하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번번이 승진에서 탈락하고 동료의 승진 턱 자리에서 애써 어색한 웃음으로 축하주를 건네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 나이들었다고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고 대놓고 눈총을 주며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저마다의 사연으로 모두 위로와 토닥거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딱히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재물을 갖지 않고도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특히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화안시(和顔施),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심시(心施), 호의를 담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안시(眼施). 그리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등 언시(言施)를 실천하는 것은 어떨까? 

더불어 새롭게 서시(書施)를 제안하고 싶다. 요즘처럼 비대면 시대의 소통 방식은 얼굴을 직접 대하고 하는 말보다 SNS상의 글이나, 톡, 쳇 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니 글의 행간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진심이나 각종 이모티콘이 삶의 소소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실수를 좀 해도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 속상했겠구나, 와우! 전보다 나아졌는데, 난 항상 너 믿어, 네가 제일 좋아, 언제나처럼 널 응원할께, 정말 사랑해.’ 마음의 아픔을 달래주고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은 명의의 처방에 따른 보약이나 테크니컬한 의사의 전문적 손길만은 아니기에 말이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는 고향처럼, 부모님의 따뜻한 품처럼 난 항상 네 곁에 있을께’ 라는 친구의 글로 인해 힘겨운 삶에 마침표를 찍으려던 모진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상대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는 따뜻한 말은 우리의 마음에 훈훈함을 불어넣어 찌푸리고 바라보았던 우리 세상을 환하게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때로는 부정적인 마음을 고쳐먹고 시련과 좌절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타인을 살리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공덕인가? 

107년, 주위의 인연들을 때로는 힘껏 응원하고 열렬히 지지하며, 때로는 따뜻하게 토닥이고 보듬으면서 보내면 어떨까?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말과 넌지시 건네는 진심 어린 눈빛과 함께 말이다.

/한겨레중고등학교

[2022년 1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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