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달라이 라마 같은 500년 된 전통도 “여기서 끝내도 된다!”라고 한 사람이 있다는 그 동네가 부럽다. 독일 출신의 미국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그룹다이네믹스와 조직개발 영역에 공적을 남긴 쿠르트 레빈(Kurt Lewin)의 말이 생각난다. “혁신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결별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몸담고 밥을 얻어먹고 있는 조직을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심리적 압박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워서 침 뱉기’인 데다, ‘그럼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냐?’라는 동료들의 빈정거리는 반응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건자가 남긴 텍스트 하나로 명맥을 근근이 100년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지도자가 새 시대에 맞게 그 낡은 교서들의 정비 하나도 못하고, 교무들의 복장, 의례나 성가 등 하나도 쇄신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또 현역에서 물러난 뒷방 노인들의 눈치만 슬슬 보고 있다가 조로증에 걸린 종교도 있다. … 교헌 개헌 이야기일 것 같다.

법 위에 군림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다. 로마 황제들은 제국의 신민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을 세상의 구원자로 끊임없이 이념화했다.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라고 칭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혁명보다 개혁이 힘든 이유가 있다. 혁명은 구체적인 적이 보이지만 개혁은 적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내는 것은 안목을 지닌 리더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안다. 다수가 원한다고 옳을 수만은 없고, 소수가 주장한다고 그 아이디어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는 문제를 깊이 숙고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유화 그림 ‘안개 바다 위에 있는 방랑자’처럼 개혁이라는 그림의 중심에 가슴을 맞추고 끝없이  펼쳐진 경치를 온몸으로 안으며 지도자의 안목과 결기를 굳혀야 한다.

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가초는, 필자의 안목으로 보면 ‘부처님’은 아니고 선지식의 한 명인데 그 앞에 수식어들을 붙이고 싶다. ‘훌륭한’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분이라고. 달라이 라마도 이제는 지긋한 나이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지도자로 각인되었다. 티베트인의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평화·정의·관용·비폭력 등 세계 종교가 공통으로 가르치고 있는 고귀한 가치관을 유머스러운 내용으로 법문을 하고 또 직접 몸으로 실천해 왔다. 그는 이성과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여러 신비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노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할 수 없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의심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선지식이다. 그를 부처가 아닌 선지식에서 멈추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전 인용에 구차스러울 정도로 지리멸렬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발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때는 스스로 깨달은 터진 말을 해야 한다. 뭔가 아쉽고, 당신의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권위 곧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인류의 지식인 동서고금의 방대한 책을 빌리는 것은 부처님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아쉬운 느낌이 든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용기에는 머리가 숙여진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2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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