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주 교무
장명주 교무

[원불교신문=장명주 교무] 달빛이 좋았다. 사무치게 좋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쬐그만 한지창에 찾아온 달빛에 끌려 한달음에 마당을 지나 돼지우리 지붕에 올라가 그 황홀한 달빛에 빠져들었다. 세상을 은은하게 감고 밝히는 그 흰빛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그 후, 원왕생가(願往生歌)에서 그리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까지 달빛은 가슴에 자리 잡고, 불현듯 떠오르곤 했는데, 묘하게 지금 내 방의 창문에서 달님을 만날 수 있다. 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모든 불을 끄고 달빛명상을 한다. 지극한 고요. 능이성 고요. 물아일체. 적적. 그리고 소소영령. 참 평온한 상태에서 머무는, 차라리 아름다운 고요라 부르고 싶은 명상이 달빛명상이다. 
 
교무라는 생활 자체가 교도가 많든 적든 교도에게 적나라하게 취사로 노출되는 일상이다. 교화에서 설교가 전부가 아닌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교무의 취사력 정도가 교화력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불가피한 상황도 있겠지만, 현재 교당에서 혹은 교단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출가교도의 책임이라고도 본다.

코로나19와 맞물려 축의 전환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종교가에서는, 후천개벽시대라고 명명되는 그 시대가 밀물처럼 기존의 가치들을 밀어내고 있다. 나나나 세대(Me Me Me Generation)인 밀레니얼 세대가 인식하는 가치는 ‘나’의 행복을 찾아서만 움직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권위에서 소통으로, 공유가 힘이 되고, 합력이 자력이 되는 세상. 그 연결의 알고리즘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환하게 다 보여주면서 
이 우주에 떠오르는 
태양이다.

한 교도가 송도에 호텔식 원룸을 가족이 이용하고 있다고, 나에게도 이용하여 휴식을 갖기를 권했다. 교당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그저 고맙게 흘려들었는데, 동기교무 몇이 걷기명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연락을 했다. 그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더구나 그 원룸이 달빛공원 옆에 있어서 달빛명상을 해보자고 하고 현재 진행 중이다. 한 달에 한번 1박 2일로 만나고 있다.

서너 명 마음이 맞는 동기 교무들과의 만남은 그저 좋다. 달빛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그 좁은 원룸을 한 발자국 안 나가도 좋다. 참 이상하게도 그 좁은 방마저도 우리가 들어가면  넓어진다. 이제 내가 돋보이지 않아도 되는, 39년 쯤 같이 한 세월에서 말이 없어도 좋다. 그리고 오직 대화는 ‘어떻게 교화하고 있는가’, ‘건강한가’가 전부다. 만나면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할 필요 없다. 알아서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서로 살아있는 마음을 공유하며, 서로 응원하는 것이 그대로 진심이고, 그대로 고맙다.

‘달빛명상을 생각만 해도 힐링이다’라며 기다리는 마음들이 있어 기다리는 시간들도 충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런 시간들이 참 필요했다는 것을. 목적 없이 만나서 큰 목적을 발견하는 이 무한한 영적 성장의 아름다운 소통이 행복하다. 요즘은 주문한 모든 것이 즉각 배송된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환하게 다 보이는 이 우주에 떠오른 태양이다. 다 드러나고 있는데, 무엇을 감출 수 있고, 무엇을 꾸밀 수 있는가. 내가 이 우주에 주문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어느 날, 한 교도님께서 “교무님, 교당 주차장만 들어서도 교무님이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알겠습니다” 하셨다. 그렇다. 세상에 내보내는 교무의 메시지는 일원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원만함·구족함·지공함·무사함. 그 일원상 진리가 완벽하게 내 안에 있음을 서로 체험하여 순간순간 광활한 천지불로 마음하늘에 둥실 일원상이 뜨는 조물주의 시간이 달빛명상의 시간이다. 곧 만날 3월 달빛 명상도 설렌다.

/구로교당

[2022년 3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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