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원 교도
이준원 교도

[원불교신문=이준원 교도] 옛날 어느 두더지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윗감을 구하려고 하느님에게 간청하니 “내가 비록 세상을 다스리나 해가 없다면 내 덕을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해에게 찾아가니 “내가 만물을 비추나 구름이 가리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구름을 찾아가니 “바람이 불면 흩어질 수 밖에 없으니 돌부처가 나보다 낫다”고 한다. 두더지는 돌부처를 찾아갔다. 부처님은“내 비록 바람에는 흔들림이 없으나, 아래에서 두더지가 땅을 파면 무너지니 두더지가 나보다 낫다”고 하였다. 이 설화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혁신은 부단한 학습의 과정이다. 세상이 변하니 새롭게 배워야 하고, 애써 배운 바를 실행을 통해 익혀서 내것으로 만들어서야 비로소 자기혁신이 가능하다. 혁신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사고의 벽, 관습의 벽, 조직의 벽을 없애는 지속적 변화의 과정이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변하는 환골탈태다. 소태산이 바라보는 혁신의 관점은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배우고 익히며, 일상생활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바를 실천하고, 스스로 배우고 더불어 가르치는 교학상장을 통해 ‘교법의 사회화, 교단의 세계화’를 지향해야 한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혁신은 나 자신으로부터다. ‘상시응용 주의사항’은 부단한 자기혁신의 평가항목, 체크리스트다. 일상생활을 떠난 혁신은 허구이자 위선이다. 원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하나의 정답은 없다. 체험에 바탕해 답하면 된다. “용심법을 배워 행하는 종교다”,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다”,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훈련의 종교다”, “도학과 과학을 병진하는 영육쌍전 종교다”, “출가와 재가가 둘이 아닌 열린 종교다.” 문답의 맥락과 상대에 따라 달리 답할 수 있겠으나, ‘무경계(borderless) 시대의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업에서 충성고객이 중요하듯이 충성교도가 중요하다. 애매한 다수보다는 정예의 소수가 낫다. 1%의 충성교도가 교단의 혁신을 주도한다. 충성교도는 손님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파트너다. 

 

세상과 교단이 둘이 아니다.
나의 혁신이 세상 혁신이요
세상 혁신이 교단 혁신이다.

오늘날처럼 양심적인 성직자가 고뇌하고 갈등하는 시대는 없었다. 왜 그런가? 첫째, 저출산 인구절벽 시대에 종교를 믿지 않는 무종교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둘째, 성직자는 고령화되는데 후진 성직자가 줄어만 가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 시대 변화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배움을 놓지않고 공부하는 학습 풍토 속에서 지자본위 사회의 선도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세상 변화의 ‘산 경전 공부’도 해야 시대에 맞는 교화를 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인류의 삶을 바꾸고 있다. 혁신의 촉매는 위기의식이다. 위기의식은 “무언가 당장 바꾸기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감이다. 제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코로나가 왔다. 산업혁명은 자연파괴를 수반했다. 천지와 부모, 동포와 법률 사은 사상은 시대적 요청이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 교단과 사회의 경계가 없다. 정신개벽의 마음자본이 인류문명을 주도해야 할 때이다. 나의 혁신이 세상 혁신이고, 세상 혁신이 교단의 혁신이다. 

세상은 급속히 변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라도 배울 수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서 자기가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스마트폰이 천리안·천리통이다. 열린 네트워크 시대다. 시공의 경계 없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며 관계성이 강화되고 있다. 소태산이 『정전』에서 ‘개교의 동기’부터 밝힌 연유가 무엇일까? ‘두더지 설화의 교훈’에서 배울 바가 있다. 미루다 보면 일은 커지고, 돌리다 보면 되돌아온다. 혁신은 가까운 데에서부터이다. 허공에 바람 불고, 바람 부니 구름 오고, 구름 오니 비 내려서, 산천초목 푸릇푸릇 봄빛이 완연하다.

/솔로몬 경영개발원 소장

[2022년 4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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