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보살이 상에 주함이 없이 보시를 한다면 그 복덕은 한량이 없다(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금강경』에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이 생길만한 어마어마한 비유가 반복된다. 4장에는 주함이 없는 보시의 공덕은 마치 저 허공을 헤아릴 수 없는 것 같이 한량없다고 말한다. 허공이 무엇인가? 바로 내 눈 앞에서부터 저 파란 하늘, 그 너머 상상하기도 어려운 우주 전체가 허공이다. 한 방향만 해도 그러한데, 동서남북·사유·상하의 모든 방향의 허공 같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머무름이 없는 보시의 공덕’이라고 한다. 그 공덕의 양이 가늠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인과보응의 이치를 말한다. 선(善)을 행하면 낙(樂)이 오고, 악(惡)을 행하면 고(苦)를 받는다. 지은 대로 받게 되는 인과의 이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인과의 이치가 호리도 틀림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복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받는 복덕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중생의 분별로 생각해 보면, 같은 양의 보시를 해도 상의 유무에 따라 받게 되는 복덕은 천지 차이라고 하는 듯하다. 더구나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 서원문’에서 ‘은생어해(恩生於害) 해생어은(害生於恩)’이란 말씀을 했다. 해독에서 은혜가 나오기도 하고, 은혜를 심었는데 해독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대종경』 인도품 17장에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소태산 대종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타원 종사는 ‘복은 지을 것이고 지은 복은 받게 되는 이치가 역력함’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잘못하면 지은 복이 죄로 변하는 이치’를 아는지 묻는다. 구타원 종사로써는 알 수 없는 말씀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지어놓은 그 복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은 그 마음이 죄를 짓는 마음으로 변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중생은 ‘나’라는 한 생각이 있으므로 한계가 생긴다. 내가 복을 지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 복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원망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내가 한 일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한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나라는 상’이 있으므로 누가 알아주면 기뻐하고 몰라주면 서운해 한다. 심하면 그 서운한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상극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는 “선을 닦는다는 것이 그 선을 믿을 수 없고 복을 짓는다는 것이 죄를 만드는 수가 허다하다”고 경책하였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상에 머무르면 애써 지은 복이 죄로 변하기도 하고, 상이 없으면 무한한 복덕이 되기도 한다. 이 머무름 없는 마음에 머물러 ‘상 없는 덕, 변함없는 복’을 짓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4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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