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이는 『금강경』 5장의 구절로, ‘응무소주 이생기심’과 더불어 『금강경』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상(相)은 지난번에 언급한 것과 같이 락사나(lakṣaṇa)이다. 이 락사나를 산즈냐(saṁjñā)와 같이 상(相)으로 번역한 것은 구마라집의 오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이 가장 널리 읽혔고, 역대로 이 문구를 참구하여 뜻을 얻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번역은 구마라집의 혜안이 담긴 탁월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무릇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고 직역할 수 있다. 밖에 있는 존재들을 물상(物相)이라고 한다면 내 마음 안은 심상(心相)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의 32구족상을 비롯한 모든 물상은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인연으로 인해 생긴 허상이다.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이 다 인연에 따른 것이고 유동적이며 변하는 것이고 허무한 것이다. 물상뿐이 아니다.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 가치관, 사상 등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생각, 영혼이라는 생각,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 등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사실 실체가 없고 허망하다. 무릇 모든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신상이 법신여래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보는 부처님의 모습은 법신여래가 중생들과 상응한 인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을 알고 어떠한 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본 부처님의 몸은 곧 법신여래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상을 보면서 상 너머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비유하면 물결을 보면서 물을 알게 되고, 물 분자를 알게 되고, 원자를 알게 되고,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신상을 보면서 그 형상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임을 알고 형상 너머의 무엇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상은 바로 법신여래라 할 수 있다. 또한 쉼 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분별심)을 보면서 그 분별심이 참 마음이 아님을 알고, 이 마음이 나오는 곳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래를 볼 수 있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닌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금강경해』에서 “무릇 상 있는 바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상이 참상이 아닌 이치를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는 말을 ‘상이 참상이 아닌 이치를 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상이 아니라고 해도 좋고, 참상이라고 해도 좋다.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을 보기 위해 궁리해야겠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4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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