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수행은 방법이 아무리 체계적이어도 자발성 없이 안 된다. 누가 해주거나 시켜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수행을 단체 분위기에 휩쓸려 어찌 했다 해도 끝내 자발성이 없으면 단체의 틀이 내면을 가둬 깊은 수행을 할 수 없다. 자발성은 의지에 달렸고 이 의지는 까닭에서 비롯된다. 물론 수행의 이유와 특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필자의 경우도 대부분의 교무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 시절, 삶에 대한 의문이 컸다. 이 의문은 그 당시 유명한 철학자나 스님 등의 책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나아가 궁극적인 이치에 대해 수행으로 체득해서 직접 보아서 알고 싶었다. 미술교사 겸 화가에 대한 진로를 출가로 선회하게 된 계기다. 불교와 원불교 모두 성리가 살아있으나, 원불교가 일과 이치를 아울러 닦고 영혼과 삶을 아울러 온전하게 하는 면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막상 출가해 보니 원불교의 선 시간이 짧아서 한때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행주좌와 간에 단전을 챙기다가 새벽좌선 때 마음을 전일하게 하면 될 것 같아 그 망설임을 접었다.

다행히 좋은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진리와 삶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이 서른에 이르기까지의 선정과 다양한 초월적 체험은 이 길의 선택이 확신으로 바뀌게 했다. 그러나 아직 대체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마음의 허기를 지울 수 없었다. 수행의 간극을 삶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메우는 한편, 사방에 펼쳐진 의식의 조각들을 연결하고, 때로는 자신만의 색깔로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여정이 필요했다. 이제는 소태산의 전망에 초석 하나를 놓는 것과 속 깊은 수행자의 고뇌에 벗하는 과정을 걷고 있다. 수많은 교무들도 각자의 수행과 영성의 색깔을 지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울려 집단 영성을 이룰 때 교단은 더할 나위 없는 수행 공동체가 된다. 

자발적 수행에 따른 영성은 자리, 돈, 세력 등으로 대체할 수 없고, 그 어떤 중상모략도 그 길을 훼손할 수 없다. 그런데 교단이 수행에 자발적일 수조차 없는 환경으로 되고 있어 문제다. 수행하는 곳이 관료화에 따른 인사로 교무들의 의식을 몇 십 년 묶으면 수행자가 수족관 물고기처럼 활기를 잃어버린다. 바다가 두려워도 바다로 나가야 산다. 교단도 수행과 영성이 살아있으려면 관료화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죽산 미국종법사의 ‘교역자 한 사람이 곧 교당’이라는 선포가 그 실마리로 보인다. 

이로써 수행의 자발성, 창의적 교화, 영육쌍전, 작은 모임 등 소태산의 전망에 따른 물꼬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게다가 교무 초빙제가 되면 기존 교당의 일부는 삼대력 출중한 교무가 관료적 영향에서 벗어나 역량을 마음껏 펼치는 등 교단의 지자본위가 실현된다. 오늘날 교단은 의식이 미래에 열린 가운데 책임감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시기다.

[2022년 4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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