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수행은 자발성에서 비롯되나 이 자발성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 당위성이다. 당위성은 자신의 목에 줄을 걸고 끌고 다니는 것과 같다. 자신을 실효 없이 고되게만 만든다. ‘당위성’에는 수행을 해야 하니 하거나, 수행자라는 체면에 이끌려서 하거나, 도량상규의 파계자로 인식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 등이 있다. 또한 관료화된 단체에서 수행이 튀는 암묵적 인식 때문에 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단체의 당위성은 관료화, 교리의 정통성, 수행의 규율과 방법 등에 의한 것이 있다. 

관료화는 세력과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이 세력을 쫓고, 세력이 욕망을 일으키기도 한다. 상호보완적인 이 둘은 아주 강렬하다. 정신이 웬만큼 맑고 또렷하지 않고서는 관료화에 물들지 않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행마저 희미하게 된다. 수행은 관료적 당위성에 함몰되면 허울과 체면일 뿐, 보는 사람이 없으면 유지되기 쉽지 않다.

이어 교리의 정통성에 의한 당위성이다. 이는 교리에 대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아야 한다며 수행 방법을 순서 없이 마냥 쫓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수행이 잘되기 어렵다. 원문에 충실하라는 뜻이 원문에 얽매이라는 뜻은 아니다. 글에는 소태산의 본의를 100% 담을 수 없고, 전달의 오차와 수없는 윤문이 있다. 원문에 치밀하게 다가설 필요는 있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본의를 협소하게 묶고 시대와 대중의 인식 흐름에 역행한다.

나아가 대중이 함께 정해진 규율과 방법 속에서 해야 하는 수행은 힘겹기만 하다. 당위성에 자발성이 지배되기 때문이다. 이런 수행은 자세 위주의 매스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수행은 기본적인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한 이후에는 각자 자신의 특성에 맞는 방법으로 해야 효과가 있다. 

원불교가 단지 좋아서 종교 공무원이 되려는 게 아니라면 수행자는 자신 수행에 진심이어야 한다. 원불교는 소태산의 뜻과 수행이 마음에 든 사람들의 모임이다.  소태산의 뜻과 수행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기관도 열고 의식도 공유하고 교화도 해왔다. 소태산은 자신의 손가락보다 손가락이 가리킨 대상을 보라고 한다. 그곳은 허울이 사라진 채 진리가 선명하고 수행의 궁극적 경지와 그 세상과의 어울림이 열려있다. 의식이 열린 이가 모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곳도 단체가 커지면서 눈앞의 권력과 이익으로 중심 이동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다수의 암묵적 동의를 위해 원문의 정통성을 빌미로 열린 수행자도 이단으로 내몰아간다. 구성원들이 평범화된 나머지 깊은 수행은 없다. 

단체에서의 당위성은 수행을 광범위하게 피폐시킨다. 종교에서 수행을 장려하고 열심히 해도 모자란 판에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종종 일어나는 이유다.  본질이 맑기에 오염도 빠른 종교는 늘 자기 성찰과 성리로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

[2022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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