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주 교무
장명주 교무

[원불교신문=장명주 교무] 일원상 정서로 사는 것은 내 인생의 목표다. 매 순간순간, 매일매일, 매년, 영생을 말이다. 그 길은 모두가 다함께 가는 길이었고, 같이 이루고 싶은, 지금 이 순간의 업무 헌신성이기도 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 속에서 난 부단히 이 가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교법 실행을 훈련한다. 때론 외롭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기에, 아니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 혼자가 아니라는 각성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첫 교화현장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한 1년쯤 지났을까. 총단회를 참석하러 총부 정문을 막 지나고 있는데, 어느 선배 교무님이 다가와서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네. 어려운 현장, 잘 살아줘서 고맙네.” 난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인사만 꾸벅했다. 정말 놀랐다. 그분은 한 번도 따로 뵌 적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법명 정도만 아는 분이었는데. 지금도 그 순간이 나를 곧추세운다. ‘나도 저러하리라. 어려움에 처한 후배들을 멀리서라도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리라.’

내 마음이 미치는 모든 대상인 ‘너’가 나를 존재케 한다. 그 너는 내 존재의 전부이다. 나로 인식하거나 못하거나 간에, 너는 나였다. 이것이 명백한 일원상 진리다. 나의 서원문 축원은 오늘도 쉴새 없이 이어진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함께 흐르는 것이다.
합쳐진 물처럼, 
교화도 그렇다.


고난을 만날 때마다 묵상한다. 그리고 간절히 마음다해 일원상 회복에 쏟아붓는다. 우주만유의 본원이라는 나의 본성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배겨낼 방법이 없기에. 일어설 수가 없기에. 

그러다 방법을 찾았다. 교법 실행이었다. 그것뿐이다. 내가 일원상이 되는 것! 교무경력에 넣고 싶은 것이 단 하나가 있다면, 이것도 그닥 의미는 없지만, 열정적으로 찰나도 놓치지 않고 일원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 진급의 그릇 확장에 내가 무시하고 간과할 사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차 산업혁명이 초연결성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때 내가 체험한 일원상 체험은 별 몇 개짜리일까. 이 코로나19가 열어버린 새로운 질적 시대에 혁신적인 탁월한 선택은 무엇일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있다. 함께 흐르는 것이다. 합쳐진 물처럼, 언제나 완벽한 것은 없다. 교화도 그렇다. 내가 가진 자질과 능력이 못 미치고, 교법실행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교단에서 시스템으로 채워주고 이끌어준다면 더 활력을 받으리라. 그 부족을 끊임없이 구성원 전체가 서로 연마하며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그 과정에서 이미 우리들의 잠재력은 용솟음칠 것이다.

수박 겉핥기식 인간관계. 립서비스. 이 뷰카(VUCA)시대에 나마저 불확실하고, 복잡하고, 모호한 뷰카의 인성으로 서고 싶지는 않다. 코로나 병균 하나가 온 인류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에 제때 온전한 생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것도 같이 가져왔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일원회상의 빅데이터는 일원상에 대한 접근 태도라고 본다.

교단혁신특별위원회에서 교단 혁신을 묻는 설문지가 세 번쯤 왔다. 의견을 묻는 것 자체가 혁신이라고 답하고 싶다.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사고, 획일적인 사고를 벗어나 공중사를 단독히 처리하지 않는 리더십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 변명하지 않고 책임지는 매력적인 지도자. 이것은 서열보다 더 절실한 요구이지 않는가. 요직에 있다고 더 중요하고 이제 막 교화 첫걸음을 한다고 덜 중요하지 않은, 기쁨 충만한 서원을 일으켜 세운다면 서열 우선주의는 좀 추락해도 좋다.

일원상 인격은, 이 열린 시대에 이미 일상원인 우리가 중도원의 지혜로 실행하는 지혜다. 그 실행의 범위는 시방원이 아닌가. 이 일원상 역량을 소태산 대종사는 『정전』으로 차분하게 충전하고, 겸손하게 서로 격려하고 응원한다. 여래 호념으로.

/구로교당

[2022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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