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수보리 :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참된 믿음을 내는 중생이 있겠습니까?(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부처님 :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한 뒤 후 오백세에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법문을 듣고 능히 믿음을 일으켜 참되다고 여길 것이다(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能生信心 以此爲實).

『금강경』 6장에서 수보리는 말세 중생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참되다는 생각과 믿음을 낼 수 있을지 걱정한다. 이에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며 후세에 청정한 믿음을 내는 중생이 있음을 말했다. 

여기의 실신(實信)은 ‘부따산냐(bhūtasaṁjñā)’이다. 구마라집은 6장에서 부따산냐(bhūtasaṁjñā)를 실신(實信), 신심(信心)으로 옮긴 데 비해, 현장은 실상(實想)으로 옮겼다. 산냐(saṁjñā)를 번역할 때 구마라집은 신(信)으로 했고, 현장은 일정하게 상(想)으로 한 것이다.

산냐(saṁjñā)는 반야(prajñā)의 반대말이다. 산냐는 ‘무엇을 앎에 있어서 부족한 정보를 자신의 기억이나 경험 혹은 타인의 설명 등을 가져와 보완함으로써 안다고 여기는 것’이고, 반야는 ‘무엇을 앎에 있어서 그것을 눈앞에 두고 보아 알듯이 정확히 아는 것’을 말한다(현진,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불광출판사, 2021).

반야가 아닌 산냐로 아는 것은 결국 믿는 것이다. ‘참되다는 생각(實想)’을 내는 것과 ‘참되다는 믿음(實信)’을 내는 것은 서로 통하는 번역인 듯하다. 구마라집이 산냐를 신(信)으로 번역한 것은 구절에 따른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반영한 듯하다.

수보리가 『금강경』의 법문을 듣고 ‘반야’를 일으킬 중생이 있을지 걱정한 것이 아니라, ‘참되다는 산냐’를 일으킬 중생이 있을지 걱정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공부인이 반야를 얻는 과정이 산냐를 기반으로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반야와 산냐는 반대말로 산냐가 없어야 반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산냐를 통해 반야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언어로는 참된 이치를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언어라는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가리킬 수 없다.

소태산 대종사는 “성리를 다루는 사람들이 말 없는 것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은 큰 병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언어도가 끊어진 자리지만 능히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말 있는 것만으로 능사로 삼을 것도 아니다. 불조(佛祖)의 천경 만론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했다(『대종경』 성리품 25장 요약). 반야는 분명히 언어의 도가 끊어진 앎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원만한 법문도 반야를 얻지 못한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산냐일 뿐이다. 다만 산냐임을 알고 산냐를 통해 반야를 얻고자 해야 한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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