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어느 시대든 사제관계는 존재해왔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지만 그 모습은 예전과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스승도 많지만, 제자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사제관계를 예전처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 고집하기에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 물론 스승과 제자가 동행하는 것이 순리임은 분명하다.

제자가 스승을 훨씬 능가한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런 경우는 혹 스승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제자가 채워주기 때문에 제자로 인해 스승도 빛을 발한다. 

그 반대도 없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스승에 미치지 못하는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일가를 이룬 집안도 그 집안이 발전하려면 선대보다 후대가 번성해야 미래가 보인다.

국가·사회·종교단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사제관계도 그렇다. 그만큼 후대에 짐을 지어주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분명 어느 세대든 그 세대가 짊어진 과제는 있다. 제자도, 스승도 몫이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역할기대가 각기 다를 수는 있다. 스승도 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속한 시기의 사회·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제자도 그 영향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스승도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편 『정전』에서는 스승을 여러 가지로 밝히고 있다. 스승의 범주를 반드시 인간에 국한하지 않았다. 사사물물에서부터, 나보다 나으면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라 했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스승만이 스승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스승은 스승으로서 밟아야 할 길이 있다. 마찬가지로 제자는 제자로서의 길이 있다. 이 길이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고 함께 균형을 맞추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때로 스승이면서 제자가 되는 중첩적 관계 속에서 산다. 

돌이켜보면 왜 스승이 제자를 찾고 반대로 제자가 스승을 찾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말이 바로 줄탁동시(啐琢同時)다. 

제자는 제자로서 성심껏 구하는 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컨대 유정란은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무정란이면 아무리 오랜 시간 품어줘도 깨어나지 못한다. 잠재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스승은 제자의 성숙을 위해 정성껏 품어 깨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 줄탁동시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반추해 볼 내용은 ‘스승은 지도받는 제자 이상의 능력과 지식을 지니고 있는가?’, ‘신뢰를 받고 있으며 사리를 취하지 않고 자기반추를 하는가?’ 등이다. 

반면에 부모 보은의 조목을 제자의 길에 그대로 적용해보자. ‘제자는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가?’, ‘나아가 심지의 안락과 육체의 봉양이며 스승이 열반 후 스승의 은혜를 드러내고 역사를 기념함과 동시에 다른 스승도 함께 봉대하는가? 아니,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가?’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제관계가 영원하다면 사제 간에 서로 가야 할 길을 공유하는 길을 생각해본다. 

사제관계도 ‘상생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 되기 때문이다.

 /원광대학교

[2022년 5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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