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 『정전』에는 실천을 강조한 흔적이 많다. 일원상법어에서는 ‘이 원상은 인간의 육근을 통하여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이요’라고 했다. 사은 장에서는 ‘은혜를 안다고 할지라도 보은의 실행이 없으면 배은이다’고 했다. 법률 보은의 조목에서는 ‘수신, 제가, 사회, 국가, 세계를 다스리는 법률을 배워 행할 것이요’라 했고, 작업취사의 목적에서는 ‘정신의 수양력, 사리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로 돌아갈 뿐이요 실 효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했다. 

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실천을 강조한 뜻은 원불교가 종교로써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짐작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앎의 과정에서 실천은 학습만으로 다 이뤄지지 않는 한계를 보완하는 중요한 요건이다. 학습은 후천적으로 얻어진 결과다. 직접적으로든 아니면 간접적으로든 태어난 다음에 배워 익혀온 결과다. 우리가 얻은 지식 대부분은 후천적 학습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학습 과정에 체험이나 실천이 수반될 수 있다. 그래서 체험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종교에는 후천적 학습보다 초 경험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법위등급에 보면 법마상전급에 ‘법과 마를 일일이 분석하고 우리의 경전해석에 과히 착오가 없으며’라고 하여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비록 종교적 체험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후천적 학습과 무관하지 않은 면을 암시한다. 물론 일과 이치 간에 누구나 어느 정도는 분별하여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출가위에서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며 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를 정통하며 원근친소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서 일체 생령을 위하여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위의 법강항마위에서 법과 마를 분석하고 경전해석과 모든 종교의 교지를 정통하는 것은 인지적 영역에 해당되기에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는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된다. 

그러나 ‘시비이해를 건설한다’거나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며 함지사지를 당해도 여한이 없는’ 경지는 인지적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어쩌면 이런 능력은 체험이나 실천적 결과에 의한 앎이나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된 결과와 체험의 복합물일 수도 있다. 물론 비록 학습은 하지 않아도 체험에 의한 결과를 인정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특히 종교에서 유무식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시비이해를 안다’는 것과 ‘대소유무를 따라 시비이해를 건설한다’는 것은 다르다. 옳고 그름과 이로움과 해로움을 아는 것과 이를 성리에 바탕하여 시비이해 관련 법과 제도 등을 건설하는 능력은 판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체 생령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여도 한이 없다’는 것은 자리이타를 넘어 자해타리를 선택하는 길이 된다. 

그러나 종교적 실천을 통해 얻은 앎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공유지대를 얻기가 어렵거나 학습을 통해 얻은 앎에 선행된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종교의 울에 갇혀버리거나 그 자체가 생명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원광대학교

[2022년 6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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