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엄밀한 의미에서 고타마 붓다를 ‘시스템 메이커’라고 할 수는 없다. 시스템 메이커로서는 G.I.구르지예프가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고, 그 뒤를 이어 소태산이 시스템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소태산은 어느 의미에서는 구르지예프보다도 더 교리와 교단에 이상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구르지예프는 자기 가르침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그것이 만세를 유전해야만 한다는 욕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의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은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살 수 없다. 인간은 항상 여럿이 뭉쳐 힘을 모아야 강해질 수 있었다. 또 인간은 함께 있어야 서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었고 개인의 능력도 키울 수 있었다.

불교
“고타마 붓다는 당시 수많은 학문을 스스로 배웠고, 스스로 깊은 사색을 한 끝에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진리를 획득하고 완성하였다는 자각을 확고부동하게 자신 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특별한 교리로 정리하여 도그마를 형성하려는 마음은 결코 없었다.”(나카무라 하지메, 中村 元)

‘붓다’란 불교 시작 전후의 시기인 갠지스강 중류지역에서 생겨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였다. 붓다는 출가재가들에게 각종의 욕망을 위해 즐거움에 빠지는 것과 고행을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계를 하였다.

그는 불고불낙(不苦不樂)의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고제(苦諦) 인생은 괴롭다는 진리, 집제(集諦) 괴로움의 원인은 애착과 갈애에 있다는 진리, 멸제(滅諦)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는 진리, 도제(道諦) 괴로움을 없애도록 이끄는 방법)에 대한 진리를 이야기 했다.

그리고 도제의 내용인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쳤다. 팔정도는 정견(正見·바른견해), 정사(正思·바른사유), 정어(正語·바른말), 정업(正業·바른행동), 정명(正命·바른생활), 정정진(正精進·바른노력), 정념(正念·바른사념), 정정(正定·바른명상)이다. 

그런데 이제 금(今) 자와 마음 심(心) 자로 구성되어 있는 정념의 념(念: 스므리띠) 자를 이규항 교수는 “이제 마음”이라고 하였다.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핵심에 가라앉는 것이 정념이라는 것이다. 정념이 안 되면 정견 또한 불가능하다. 
 

불교는
개인적인 진실한 실천적 가르침으로 
세상의 고(苦)를 
극복하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고타마 붓다의 불교는 여느 인도 출생의 종교들처럼 그룹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완성에 초점을 맞췄다. 각양각색의 제자들을 접견하면서 나타난 수행 방법의 차이에 대한 용인과, 인도라는 지역과 문화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는 붓다의 중도주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 붓다의 태도는 불교의 전파를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또한 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동되었다. 분열이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붓다의 열반 100년 후에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 분열이 발생했다는 것은 분열의 속도로서는 굉장히 완만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것은 수없이 부딪치고 아프게 닳아 모서리가 둥글둥글해진 해변의 몽돌 같은 부처님의 인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지라도 기존의 것과 척을지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동물 희생제를 반대하면서도 불에 대한 제사는 최고의 제사라 했고, 제사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것을 피하려는 입장이었다.

예수도 당시 유대사회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인 전통에서 벗어나려 했듯이, 불교 또한 힌두사회의 배타적인 적대성이나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탈출하려는 하나의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불교는 무아(無我)사상을 제외하고는 당시 여러 학설과 대립하는 특별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인도 출신의 부처님들이 그렇듯이 사회변혁의 의지 같은 것보다는, 개인적인 진실한 실천적 가르침으로 세상의 고(苦)를 극복하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여래가 설하신 법(法)과 율(律)은 공명하게 빛을 발하여 감추고자 덮는 일이 없습니다.”(앙굴라 니까야, Ⅲ, 129) “여래의 법에는 스승의 움켜쥔 주먹이 없습니다.”(디가 니까야,Ⅱ) 주먹 속에 감추고 숨기는 일이 없이 붓다는 오직 법을 깨닫고 오로지 대중들을 위해 그것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우빠니샤드 철학이 글자 그대로 ‘비설(祕說)’이라는 뜻으로, 비밀스러운 가르침인데 반해 붓다는 진리를 만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의 태도는 “비록 이교도라 할지라도 한 문장이라도 알아주면 좋다. 그러면 오랫동안 그들을 위한 것이 되고, 그들을 안락하게 할 것이다.”(쌍윳다 니까야, Ⅳ)라는 입장이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2년 6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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