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원불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용심법(用心法)이다. 그 목적은 사람 사람이 마음을 잘 써서 행복한 세상을 이루는 데 있다. 그런데 그 용심법의 궁극적 기준이 여래다. 대부분의 사람이 ‘헉’하고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설사 여래의 뜻을 품었다 해도 현실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그 시작은 세상 보편적 가치에 충족하는 것부터다. 게다가 동물과 인권과 환경을 생각하고, 일 처리가 공정하고 합리적이라면 준수한 정도는 된다. 나아가 포용과 배려에 인색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진리를 벗하며 따듯한 법다움까지 지닌다면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이다. 사실 여래의 심법을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것은 지레 겁먹은 것에 불과하다.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여래가 이미 자리하고 있는 것이니 되고 못 되는 것은 마음 발현에 따른 것뿐이다. 

원불교는 소태산 생전에 가까울수록 제자들이 자리보다 부처의 심법을 지니고자 하는 모습이 컸다. 부처의 심법이 마음의 기준이 되어 부처의 심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음 쓰는 것으로 문답을 이루었다. 나아가 부처 심법의 내면화를 위해 수행하고, 이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인재가 나타나면 귀하게 여겨 법답게 활용하고자 모색하고, 누구든 교법과 수행과 교화 등에 발전을 일으키면 내 일처럼 좋아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수행자의 양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 있게 여기며 움직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은 보편적으로 실현 희박한 큰 목표보다 가시적으로 실현 가능한 소박한 행복을 추구해간다. 이러니 부처와 부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부자가 목표로 될 확률이 높다. 중앙집권적인 종교의 경우 돈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자리에 따른 권력이다. 이에 이르는 길인 인맥에 줄 서는 것이 인간 보편적인 모습이니 비난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는 고기 눈에 한정되어 사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을 뜨면 인간의 울을 벗어버린 세계가 더 크고, 존재의 시간이 더 길다. 게다가 존재의 질은 영적인 수준에 비례한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일정 수준에 이르면 육도를 자유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집약된 시간과 정보로 수행하기 좋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했으니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영적으로 온전할 수 없기에 소태산은 현실과 영적인 것을 한 선상으로 보고 영육쌍전을 강조했다. 현실의 삶을 영적인 관점에서 직시할 수 있어야 현실의 어떤 삶이 수행의 허와 실인지 안다. 이로써 실다운 삶과 수행으로 영적 지고한 수준을 이룰 수 있다. 

즉 재색명리가 있든 없든 고기 눈에 그치면 영혼을 탁하게 할 뿐이나, 마음의 눈이 열리면 수행과 행복의 자료일 뿐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의식이 열려야 삶이 의미로 가득 차고 수행도 한다.

[2022년 6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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