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훈 교무
길도훈 교무

[원불교신문=길도훈 교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수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다 보니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아도 원초적으로 만족될 수 없다. 허기진 마음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자아실현과 일 그리고 의식이 깨어 존재하는 것을 넘어 영적 차원의 세계까지 의식이 펼쳐질 때 채워질 수 있다. 

그런데 영적인 의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도 그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이 ‘의식주와 좋아하는 사람들과 레저 즐기는 것을 넘어 의식이 깨어 열린 사람과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노력해갈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정도다. 그래도 이런 의식에는 자신을 넘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배려할 줄 알고, 삶에서 하나의 물건과 한 인간과 자연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지구와 우주와도 조화와 균형이 잡힌 생각과 삶이 있으니 귀한 삶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결국 영적으로 승화되지 못한다면 마음 한편 허전함은 채워질 수 없다.

영적, 즉 마음의 눈을 떠야 영성이 맑고 밝아서 지금의 시간이 영원의 한 선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안다. 그러니 삶의 순간순간에 온전하게 깨어 삶에 의미를 담을 뿐 아니라 이 의미를 사람마다 영적 성장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마음에 여유와 기다림과 따듯함이 없을 수 없다.

이런 의식과 삶을 위한 최적의 방법이 수행이다. 물론 수행만으로 모든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수행에는 진리에 대한 기초적 인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도 굉장히 필요하다. 수행의 폭과 질, 그리고 방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선지자들은 대중에게 “법문을 많이 듣고, 진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일상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이것도 어느 정도 했으면 성리로 다시 볼 수 있어야 개념과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 인식이 마음 깊이 켜켜이 쌓여 있을 때 수행을 통해 열리는 순간 그 기반으로 펼쳐 열린다. 

수행은 성리와 더불어 좌선, 행선, 무시선 등으로 균형 잡힌 수행을 해야 온전한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할 때 내용과 시간 모두에서 실효를 본다. 이 또한 수행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을 찾아가야 기준이 서며 까닭이 있는 수행이 된다. 

수행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 잘될 때와 안 될 때 등 자신의 마음과 기운의 차이를 살펴서 수행에 진심이 되어 자신에게 최적화된 수행으로 결국 선정에 이른다. 이것이 반복되며 성품이 내면화되고 분석과 깊은 사유로 아는 것을 넘어 진리를 직접 보고 알게 된다. 이런 직관은 진리에 대한 굵고 확실한 정보이나 듬성듬성한 면도 없지 않다. 다시 합리적 사유를 통해 촘촘히 정리돼야 온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진리와 호흡하고, 생각과 기운이 하늘과 맞닿아 함께 움직여 간다. 

[2022년 6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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