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천 교무
고세천 교무

[원불교신문=고세천 교무] 논산교당에 부임해 1년 52주 법회 때 『정전』 목차대로 교도님들과 공부를 하여 5번째 접어들었다.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는데, 교도님들은 어쩔지 모르겠으나 설교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많은 공부가 되고 있다. 30여 년을 거슬러 원불교학과 서원관 기숙사 학생시절로 되돌아간다면 A학점 우등생이 될  정도로 말이다.

원불교의 교리는 일원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교리도를 보면 일원은 법신불로서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일원상은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일원의 진리에 들어가는 신앙문과 수행문으로 되어있다. 여기서의 문은 글월 문(文)이나 물을 문(問)이 아니라 내왕하는 문(門)이다. 따라서 원불교에 들어가는 오른쪽 문은 신앙문이고 왼쪽 문은 수행문이다.

신앙을 잘하면 복락을 받고 수행을 잘하면 인격이 향상된다. 반대로 신앙을 잘못하면 죄와 벌을 받고 수행을 잘못하면 무시와 천대(賤待)를 받는다. 신앙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공법계 법신불에 마음으로 올리는 진리기도다. 조석심고가 그것이고 월초기도, 보은기도가 그것이다. 둘은 사은님을 비롯한 형상있는 대상에게 올리는 실지기도다. 실지기도의 다른 말은 불공으로 특히 사람에 대한 불공이 중요하다.
일선교당에서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진리기도를 한다. 건축불사를 위한 천일기도, 시험합격을 위한 백일기도, 생일기도, 차량안전기도 등의 진리기도는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실지기도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기존의 진리기도와 더불어 새로운 방식의 실지기도를 말씀하셨다. 『대종경』 교의품 15장의 이야기처럼 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 대상에게 공을 들이는 방식은 기존의 신앙을 한층 더 진일보시킨 것으로 일원상 신앙의 완성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는 아직 실지기도의 여유로움이 묻어나지 않는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정전』 제3 수행편 제10장 불공법에서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실지기도법)을 말씀해 주셨는데 현장에서의 실현은 아직 요원하여 양에 차지 않는다.

 

이제는 
기존의 진리기도를 넘어서
삼라만상 모든 부처님 각각에 맞는
맞춤형 실지기도 불공을 익히고 
연습해 실천해야 한다.

신앙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정말로 그렇다. 그래서 신앙의 속성은 기복(祈福)에 있다고 본다. 복을 비는 것은 이상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합리적이고 사실적으로 빌지 않고 미신적으로 구하면 그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이비 신앙이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 신앙으로 해결을 해보자. 첫 번째 방법은 법신불전에 기도를 한다. 법신불 일원상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지성이면 감천으로 하늘이 응해서 먹을 것이 생긴다. ‘에이~’ 하고 곧이 듣지 않는 분도 있을지 모르는데 이런 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평탄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함이 부족해서이다.

두 번째 방법은 농사지은 쌀로 밥을 지어 먹거나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으면 된다. 이것이 실지기도이다. 실지기도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배가 고픈데 마을 입구 고목나무나 산속 바위 앞에서 무작정 기도만 한다면 이것이 미신이고 거짓 신앙이다.

혹자는 원불교인들의 신앙성이 약하다고 말한다. 개신교인들은 예배를 보면서 하나님에게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도 하고 즉석기도문이 줄줄 나오는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해서다. 이러한 원인으로 신앙의 대상인 법신불 일원상이 기독교나 불교에서 부르는 ‘하느님’, ‘부처님’과 같이 일반화되지 않아 재가출가 교도들 피부에 살갑게 닿지 않는다. 신앙성이 약하다고 동조하는 또 다른 면은 사은에 대한 신앙 즉 모든 부처님(처처불상)을 놓고 그들에게 맞춤형 눈높이 불공법을 학습하지 못해서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과 함께 함에 있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 하는 게 아니라 교법으로 재단하여 교화하는 사람과 교화받는 사람으로 성속(聖俗)을 나누는 습관이 있다. 나만 해도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색하다. 사회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데 외로운 섬이 된 것 같이 낯설다. 교무라는 상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을 만나면 처신을 어떻게 하며, 원불교 출가교역자 위신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분별하게 된다. 지금까지 교단 안에만 있었고 교단을 떠나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아보질 못해서 굳어진 것 같다. 비단 출가자들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재가교도님들도 그런 훈련을 받질 못했다. 원불교 마음공부하는 사람으로 세속을 떠나 성스럽고 모범될 행동만 하여 사바세계 비종교인들과 함께 하는 자세가 부족했다고 본다.

이런 모습이 교단주의로 굳어지진 않을까 염려된다. 어느새 우리는 원불교인들만의 성채를 쌓고 그 안에서 고고하게 지내고 있다. 세상과 함께하는 치열한 삶의 모습이 흐려져 소태산 대종사님이 경계했던 출가 스님들의 일상이 어느덧 나에게 드리워진다. 지자(智者)를 선도자로 삼아 우자(愚者)를 이끌자는 선별적 지우차별을 넘어 출가교도는 지도인이고 재가교도는 지도받는 사람이라는 신분적 차별의식도 함께 길러지고 있다. 재가출가 9인 제자들과 불법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를 외쳐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 물질을 선용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늘에 기도했던 젊은 청년 20대 소태산 대종사가 바라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만약 하늘에 소태산 대종사님이 계신다면 ‘이렇게 하려고 원불교를 열지 않았는데’ 라는 자괴감을 갖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가 잘하는 기존의 진리기도를 넘어서 삼라만상 모든 부처님 각각에 맞는 맞춤형 실지기도 불공을 익히고 연습해 실천해야 한다. 특히 나와 함께 하는 가족들과 직장동료, 이웃들에게 진정성 있는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전생에도 함께 했지만 다음 생에서도 지근거리에서 나를 도와줄 가장 가까운 인연이기에 그렇다. 

일원상 신앙은 그 둥근 모습만큼 나와 이웃을 감싸서 한 기운 한 울타리로 보살펴 준다. 나와 우리들이 접하는 모든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부처님으로 여기고 존중하여 받드는 사사불공의 사례를 만들어보자. 일원상 신앙에 있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확신과 실행과 성취감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실상사 노부부를 상담해 주었듯이 우리도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실지기도, 불공법을 신앙운동으로 자리매김하자.

/논산교당

[2022년 6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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