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흔히 생각하기에 법(法)은 분명해야 한다. 누가 읽던 동일하게 해석되어야 하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하여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증득하고 말씀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한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제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또 여래가 말씀하셨다고 할만한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금강경』 7장)”

『금강경』이 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相)을 놓으라는 것이다. 곧 어떤 법도 고정불변의 실체를 갖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생은 상(相)을 가지고 산다. 나라는 생각이 있기에 내 앞에 재색명리를 쌓아놓으려고 하고, 이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니 괴로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상은 가상이고 허상일 뿐이다. 그 어디에도 실체와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상을 만들어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상을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상을 놓는 공부가 쉽지 않다. 경전과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애써 상을 놓고자 하지만 힘써 공부하는 수행자들도 십중팔구 법상에 걸리곤 한다. 어쩌면 상 중에 가장 고약한 상이 법상이고 공부인이라는 상인 듯하다. 법과 마, 중생과 부처를 나눠서 공부하다가 마를 미워하고 중생을 업신여긴다. 이는 부처님의 본의가 아니다. 그러니 법상을 놓으라고 한다.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법상을 놓으라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無非法相). ‘고정불변의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스스로를 부정한다. 부처님의 말씀도 역시 고정불변하는 원리일 수 없다. 여느 법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법도 실체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정해진 법이 없다(無有定法).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다만 오답을 말해서 잘못된 생각을 깨뜨릴 뿐이다. “예쁘고 밉고 참마음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 참마음 아닙니다. 허공처럼 텅 빈 마음 그것이 참마음. 이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원불교 『성가』, 182장).” 참마음이 무엇인지는 표현하기 힘들다. 강연히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예쁘다는 마음을 부정하고 밉다는 마음을 부정해서 참마음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인가? 중생의 사고로는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다. 하지만 꼭 그러할까? 부처님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전하고자 하셨던 바는 무엇일까? 세속제(世俗諦)를 부정하고자 승의제(勝義諦)를 밝히지만, 이를 통해 얻은 법공(法空)에 집착하지 말고 다시 현실에 나올 것을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뜻을 고민해야겠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6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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