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법으로 인해서 (중생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금강경』 7장)

무위는 ‘asaṁskṛta’의 번역어이다. 브라만교의 시각으로 보면 산스끄리뜨(saṁskṛta)는 ‘브라흐만에 의해 다듬어 놓은 완벽한 것’을 말한다. 반대말인 아산스끄리뜨(asaṁskṛta)는 ‘브라흐만에 의한 조절이 결여된 것, 불완전한 중생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아뜨만, 나아가 브라흐만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saṁskṛta를 ‘완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된 것’으로 본다. 오히려 asaṁskṛta를 ‘불완전한 상태’가 아닌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로 여긴다.

많은 종교에서 신, 영혼 등 고정불변하는 실체를 인정한다. 이들 종교에서도 계문을 지키고 복을 짓는다. 종교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도 어렴풋이 인과의 이치를 알기에 금기하는 것이 있고 복을 지으려고 한다. 이는 불교의 수행자와 다르지 않다. 차이는 ‘제법의 실체성’에 있다.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행위의 주체인 나와 완벽한 절대자를 전제하는 것이다. ‘나는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saṁjñā)’을 전제하고, 부족한 내가 완벽한 절대자와 합일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한다. 실체인 행위의 주체를 인정하기에 결코 상을 깨트리지 못한다.

중생의 자연스러움은 ‘결함을 내재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것’이다. ‘정해진 바 없는 법(無有定法)’ 혹은 ‘함이 없는 법(無爲法)’은 완벽한 중생의 자연스러운 행위이고, 결국 상을 깨트릴 수 있다. 정해진 바가 없으니 얻을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법이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다. 여기에 불교의 차별성이 있다. 복을 짓는 것과 나아가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나 무위법으로 인해 범부와 부처의 차이가 생긴다.

또, 돌려서 생각해보면 부처님은 무위법에 근거하여 차별법을 사용한다.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되지 않는 마음 상태가 우리의 본성(本性)이다. 무위의 마음인 본성이 경계를 대하면 그 대상에 알맞은 마음이 나온다. 이 마음을 그대로 사용하면 선(善)이고 정(正)이고 지혜가 된다. 하지만 사상의 차별심에 가리어 왜곡돼서 발현되면 악(惡)이고 사(邪)이고 어리석음이 된다. 무위법에 바탕해서 차별심을 내는 것은 인과에 따른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본성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의 차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차별 없는 평등만 강조하면 부처님의 법은 아니다. 무위에 바탕한 차별심을 내는 것, 곧 상대에게 알맞게 불공하는 것이 진공묘유의 공부법이고, 성현과 범부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7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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