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영 교무
고준영 교무

[원불교신문=고준영 교무]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 가운데 큰 일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그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중생을 건지는 일이라, 이 두 가지 일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큰 일이 되나니라.”(<대종경> 제4 인도품 6장)

언젠가 담소를 나누며 점심 공양을 하던 중, 문득 궁금해져서 모시고 사는 교무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교무님의 서원(誓願)은 무엇이신가요?” 

교무님께서는 한 마디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주세불이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주세불은 대종사님이신데?’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가볍게 여쭤봤는데, 소박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들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갑자기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상상조차 못해 본 서원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교무님께서는 “주세불은 꿈도 못 꾸는 그 마음을 부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도님들은 어떠한 서원을 가지고 계신가요? 이 회상에 들어오셔서 어떠한 목표를 세우셨나요? “나는 출가 안 했는데, 서원 없어도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우리 회상은 재가출가 구분 없이 함께 공부하는 회상이며, 큰 서원으로 깊은 공부를 하신 교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도는 입교를 하면서부터 여래가 되고 여래행을 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부여되나니, 이러한 의무와 권리는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으로부터 누구나 부여받는 바라, 이는 우리 교단이 단전(單傳)이 아니고 공전(共傳)의 회상임을 드러내는 것이니라.”(<대산종사법어> 제5 법위편 3장)

우리가 학기 말 시험을 보며 자신의 공부 정도를 평가하듯, <정전>대로 공부를 계속해왔다면, 마지막 장인 법위등급을 보며 자신의 공부 정도, 심법 정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법위등급의 가장 마지막 ‘대각여래위’는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사람의 위’니라” 하고 마칩니다. 당연하게도 대각여래위 또한 사람이며, 이 <정전> 전체는 어느 특수한 사람에게 내려진 법문이 아닌, 하근기부터 최상근기까지 모두가 보고 공부하도록 내려주신 법입니다. 공부심 깊은 한 교무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각여래위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생각하셨던, 궁극적으로 바라셨던 보편적인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다.”

많은 후진들의 존경을 받으셨던 법타원 김이현 종사는 처음 출가 시, “이생에 항마위만 하자”고 다짐하셨다 합니다. 항마위도 성자니 그마저도 너무나 크게 느껴졌는데, 대산종사께서 혼을 내시며 “출가위를 표준 잡아라” 하셨다 합니다. 출가위가 늙으면 여래위라 하지요. 항마위를 목표하면 항마위에 못 미치기 쉽지만 출가위·여래위를 목표하면 항마위를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깨달음이 
나의 깨달음이 되고, 
소태산 대종사님의 자비가 
나의 자비가 되기를.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우리가 어디까지 목표를 세우기를 원하실까요? “내 이번 생 목표는 항마다”라고 했을 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런 기분일 수도 있습니다. “엄마! 나 반에서 20등 할 거야!”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래. 네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을 했다” 하실까요?

막연히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평소 어디에 정신을 쏟고 있으며, 어떠한 꿈을 꾸고 있는가. 법타원 종사는 늘 저희에게 “나의 현주소를 알아야 한다” 하셨고, 저는 그 말씀을 ‘지금 나의 신앙·수행 정도, 공부 정도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지금 나의 서원·내가 삼고 있는 목표·내 마인드의 현주소가 어디일까 싶어졌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 중생의 마음이 있고, 중생의 행을 한다 할지라도, 내 안에 ‘기필코 부처 되리라!’하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가?

어린 아이들이 무언가를 잘했기에 우리가 예뻐하는 것이 아니고 컵을 깨거나 이불에 쉬를 했다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듯,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우리가 이러한 업적을 세웠다고 유독 예뻐하고, 이러한 잘못을 했다고 미워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그 마음에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제자를 보시면 흐뭇하고, ‘나는 중생이라 안 될거야’라며 좌절하는 제자는 안타까워하실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우리가 어디까지 목표를 세워야 “그만 하면 되었다. 그래, 잘해보거라” 하실까요?

“법강항마위까지는 ‘부처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하는 큰 발분을 가지고 기운을 돋우며 정진하여야 하고, 법강항마위부터는 중생과 부처가 본래 하나라는 달관을 가지고 상(相)을 떼고 티를 없애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야 그 공부가 길이 향상되나니라.” 정산종사님 말씀입니다.

어느 교무님께서 ‘<정전>은 여래를 표준잡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법회 시간마다 외우는, 날마다 조석으로 외우라 하신 ‘일상수행의 요법’도 쉬워보이는 간명한 글이지만 ‘여래를 표준 잡은’ 말씀입니다. “부처는 누구이며 중생은 누구런가.” 물론 자기객관화, 자기 수행이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 부처를 향한 강렬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큰 원이 있은 뒤에 큰 신이 나고, 큰 신이 난 뒤에 큰 분이, 큰 분 뒤에 큰 의심이, 큰 의심이 있은 뒤에 큰 정성이 나고, 큰 정성이 난 뒤에 크게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음에도 천통 만통이 있다 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밝혀주신대로, “반드시 대각여래위를 이루고야 말리라!” 강한 원을 갖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해탈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나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우선 확실한 서원을 가진 후에 필요합니다.

저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서원이 나의 서원이 되고, 소태산 대종사님의 포부가 나의 포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깨달음이 나의 깨달음이 되고, 소태산 대종사님의 자비가 나의 자비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우리 재가출가 교도님들은 어떠신가요? 이 회상에 오셔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목표를 가지셨나요? <정산종사법어> 제7 권도편 8장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영생을 통하여 이 회상을 여의지 아니할 큰 서원과 큰 신념이 확실히 섰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회상을 만났을 때에 기필코 진리 오득하기를 발원하며, 대각하신 스승님의 법연 여의지 않기를 발원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성불과 제중으로 영겁을 일관하라.”

/강남교당

[2022년 7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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