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 한 권’과 ‘빌딩 한 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고를까? 현대 사회의 화폐가치로 보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금강경>에는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정도의 일곱 가지 보물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의 사구게 등을 전하여 사람에게 번뇌를 끊게 하는 복덕이 더 크다고 말한다.

<금강경>에서 칠보보시의 공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칠보보시를 하는 사람의 복덕이 정령 많겠느냐?”는 부처님의 질문에 수보리는 분명히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어서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福德多)”라고 말한다.

여기에 복덕과 복덕성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복덕성은 구마라집의 의역이다. 구마라집은 복덕과 복덕성을 구분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한 것으로 보인다. 칠보를 사용한 재시(財施)의 복덕은 크지만, 그것이 복덕성은 되지 않는다. 쌓여 있는 복덕이 아무리 많아도 이는 유형의 것이고 한계가 있다. 참으로 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복덕을 만드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복덕성을 얻어야 한다. 

재물을 보시받는 것은 나의 필요와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눈앞의 괴로움을 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재물은 결국 소진될 것이고 나의 욕심이 그대로라면, 잠시 미루어 놓았던 괴로움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 칠보의 보시는 복덕은 될지언정 복덕의 원천은 되지 못한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상을 놓게 하고,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한다. 상을 놓으라는 것은 나라는 집착을 놓아서 분수에 편안하게 하고 욕심을 놓게 하는 것이다. 마음을 내라는 것은 인과의 이치에 따라 복락을 짓는 육근동작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복덕의 원천이 된다.

칠보보시는 잠시 고통을 미루어주는 진통제가 된다. 하지만 괴로움을 해결해주는 치료제는 못 된다. 고해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치료제는 <금강경>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진통제와 치료제는 모두 필요하다. 고통이 심한 환자에게 진통제는 필수적이지만, 치료제가 없으면 환자의 고통은 멈출 기약이 없다. 또한 아무리 좋은 치료제가 있어도,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면 널리 쓰일 수 없다. 선후를 따지면 고통이 심한 사람에게는 진통제가 먼저일 수 있다. 그렇지만 본말을 따지면 진통제는 치료제의 가치를 넘을 수 없다.

소태산 대종사는 영육쌍전을 말했다. 복덕이 되는 재시와 복덕성이 되는 법보시를 모두 실행하여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고 온전하게 하는 공부인이 새 시대의 새 불법을 닦는 공부인이라 할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7월 1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