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창의성이란 새로운 관계를 지각하거나 비범한 아이디어를 산출하거나 전통적인 사고유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형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 교육에서 ‘창의력’은 빈말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가르치는 사람이 제공하는 바를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수용력만 기르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중등교육은 말 그대로 학력을 기른다는 이름 아래 입시교육이 지배한지 오래다. 심지어 대학마저도 취업이라는 명분 아래 주입식 교육이 깊게 자리하여 창의력이 설 자리가 막연하다. 

우리 교단에서도 ‘구정(九鼎) 선사의 이야기’나 ‘스승에 대한 신심, 목침이 되라’는 등의 법문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과연 이런 법문들이 창의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또 창의력이 필요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이대로만 하면 성불이 된다’고 법문의 맹목적 수용을 강화하는 기제로 받아들이지는 않는지도 모른다. 일반 사회에서도 길들여진 양은 야생에서의 생존을 의심받는다고 한다.

과연 종교에서도 창의성이 필요한가? 새로운 관계, 비범한 아이디어가 종교에서 설 땅이 있는가? 그저 교조의 가르침이나, 경전에 제시해준 대로 실천하면 될 일이지 왜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한가? 만일 필요하다면 어떤 분야에서 얼마나 왜 필요하며, 어떻게 창의력을 길러낼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는 수평 문화보다는 수직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자기 생각이나 견해를 제시하는 데 머뭇거리게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상명하복, 수화불피 등과 같은 문화는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게 하고 심지어 부자연스럽게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매우 의기소침해지고 윗사람의 눈치만을 바라보기 일쑤다.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충고한다. 교리에는 “정의거든 죽기로써 실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막상 불의에 대한 저항이나 개선을 요구할 경우 높은 장벽을 실감케 한다. 

이는 대화보다 일방적인 듣기 문화에 길들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보는 풍토나 건전한 비판이 설 땅이 없는 사회는 발전이 멈춘 것과 같다. ‘폐쇄사회일수록 눈으로 정보를 접하기보다는 귀만 발달한다’는 이야기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느 사회든 두 사람 이상 모이면 생각이 다르다. 문제는 다른 생각을 어떻게 소화하고 발전 지향적으로 수용하느냐다. 다행히 우리의 교리에 생각의 다름, 건전한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이 설 땅이 있다. 솔성요론에서는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응할 것이요”라고 가르치고, <대종경>에서는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의 질의응답·문답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회의·대화·법회·단회에서는 질의응답·문답감정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어떤 사회나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건전한 비판과 창의력을 존중해줄 때 지속 가능한 성장 발전이 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순혈주의, 동종교배(Inbreeding)의 악순환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합스부르크 왕가(Haus Habsburg)의 몰락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원광대학교

[2022년 7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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