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오늘날 신문에 관한 생각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다양한 미디어의 등장으로 신문도 종전 같지 않지만, 언론매체의 한 축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사실 보도를 넘어서 기자의 시각에서 쓰인 보도 내용은 때로는 논란을 넘어 혼란과 언론매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특히 정치적 기사는 더욱 그렇다. 

이런 마당에 후세대에 신문을 통한 교육(NIE, Newspaper in Education)은 어쩐지 어색하고 심지어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또, 우리의 정서에는 신문을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증발시키는 매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마디로 ‘공부인에게는 세간의 기사 내용이 공부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때문이다(<대종경> 수행품 20장, 인도품 35장, 교단품 26장, 전망품 10장 등).

그러나 과연 후세대들이 신문을 보고 그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한다면 그저 제쳐만 두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교육의 매체로 활용할 길은 없을까를 생각해본다. 신문은 잘 활용하면 좋은 학습 매체가 될 수 있다. 단순히 글쓰기나 논리, 논술 차원을 넘어서 정의란 무엇인가, 시비이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가치판단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에서 바르고 빠른 연구력과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광복 이후 원불교가 사회 구원을 위해 앞장선 대표적인 사례로 전재동포구호사업을 든다. <원불교 교사>를 비롯하여 각종 자료에서도 잘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단 내부에 알려진 바에 비해 당시 외부 언론 보도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편이었다. “무념보시면 됐지 왜 굳이 당시 사회 언론 보도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를 반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재동포구호사업은 교도를 대상으로 한 교화 활동보다 불특정다수의 전재 동포를 대상으로 한 대사회 불공이었다. 당시 <매일신보>(1945.10.2), <자유신문>(1945.12.17) 등의 보도에 따르면 미군정에 등록된 민간단체 목록에 익산의 불법연구회가 등록되었다는 사실 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 각지에는 수많은 원호 단체가 뒤를 이어 설립되고 있거니와 경성에 있는 조선인민원호회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3천만 겨레의 총력으로써 전재 동포에 대한 더욱 힘찬 구제 운동을 일으키고자 여러 가지로 극력 주선을 한 결과 1945년 9월 30일 오후 2시 반 경성 숙명여고에서 조선원호단체대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참가한 단체는 13개 단체였다.” 1945년 12월 15일 미군정 윌슨 중좌는 서울 원호단체연합중앙회에 가입해야 한다고 했는데, 당시 허가된 종교단체는 불교, 기독교, 안식일교, 불법연구회 등을 비롯한 13개 단체였다(<자유신문>, 1945.12.17.). 

당시 불법연구회의 전재동포구호사업 관련 신문기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의미 있는 시사를 준다. 대사회 불공일수록 사회와 공유하면 더욱 의미 있는 활동이 된다는 것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평범한 교훈이다. 

<원불교신문>을 통해 공유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얻는다면, 그 노력이 교육적이면 더욱 의미 있는 접근이 되지 않을까 제언해본다. 한 걸음 나아가 <원불교신문>을 적절히 활용한 교화를 생각해보자. 신문을 통한 교육이 익숙하지 않지만, 교육적으로 활용의 여지를 남겨본다.

/원광대학교

[2022년 7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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