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금강경>에서 사구게(四句偈)를 전하는 공덕이 여러번 반복된다. 사구게를 수지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공덕이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칠보보시 혹은 몸과 마음을 바친 보시보다도 공덕이 크다는 것이다. 단순히 사구게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칠보보시보다 더 큰 공덕이 될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산스끄리뜨어 ‘catuṣpādikām gāthām’은 ‘네 구절로 된 게송’을 뜻한다. 이를 구마라집은 사구게, 현장은 사구가타(四句伽他)라고 한역하였다. <금강경>에서 게송은 28장과 32장에 2차례 나온다. <금강경> 중 유명한 구절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엄밀히 말해 <금강경>의 한 구절일 뿐 사구게는 아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분량이 약 300송 정도가 된다고 해서 “삼백송반야경(三百頌般若經)”이라고 부르기도 하니, 이 구절을 사구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사구게가 특정 게송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인도에서는 숫자 4는 ‘온전히 갖추어진 것’을 나타낸다. 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고등 동물의 손발이 넷이어야 온전히 갖추어진 것으로 보는 것에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에 인도의 고대 시가는 주로 4구절의 게송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사구게는 널리 알려진 특정 게송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금강경>에 담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전히 표현된 하나의 문장을 의미한다’고 여겨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사구게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爲他人設)’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정산종사는 <금강경해>에서 ‘사구게’ 혹은 ‘사구가타’를 ‘사상(四相)의 제거’로 표현했다. 예를 들면 11장에서 “만약 수도인이 이 경 가운데 사상의 이치를 잘 해석하여 다른 사람에게 많이 설하여 준다면 그 복덕이 또한 그와 같은 칠보보시에 비하여도 훨씬 승하리라”고 하였다. ‘사구게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사상의 이치를 잘 해석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문자의 전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여 그 본의를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금강경>에서 강조되었던 것 같이 법보시의 공덕은 어떠한 재보시의 공덕에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이는 재물의 보시는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법보시는 영생의 복락을 장만할 수 있는 지혜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단지 문자를 전하는 것은 공덕이 되지 못할 듯하다. 내가 먼저 이해하고, 실천하고, 모범이 되며, 다른 사람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는 것이 진정한 법보시가 아닐까 한다.

/영산선학대학교

[2022년 7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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