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불교에서는 반야를 제불의 어머니(諸佛之母)라고 말한다. 이 반야를 담고 있는 <금강경>도 역시 제불의 어머니다. <금강경>에 전하고자 하는 반야가 성불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경>은 반야와 함께 반야를 얻기 위한 방편을 담고 있는 듯하다.

<금강경> 8장에서 부처님은 “<금강경>을 전하는 공덕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보시의 공덕보다 더 크다”고 하고, 그 이유를 스스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가 성취한 아뇩다라샴먁삼보리는 모두 이 <금강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불법이 담긴 경전의 소중함이 강조됨과 동시에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하여 경전의 가치가 부정된다. 이러한 반전과 모순은 참된 지혜를 얻게 하는 방편이 되는 것 같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말은 널리 알려졌다. <금강경>이 가리키는 달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매달려야 한다. 

하지만, 분석과 상상으로 달을 그리고 보면 달은 하나의 상(相)일 뿐이다. <금강경>에서는 이 사량의 달을 깨버리고자하는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금강경>을 사량으로 해석하고 만족한다면 <금강경>에 사로잡힌 것이다. 금강경에 사로잡히면 금강경은 금강경이 아니게 된다.

<금강경>이 소중한 것은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반야가 진리를 보는 지혜이며 세상을 바르게 보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경>은 끊임없는 부정과 반전의 방편을 통해 우리를 사량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반야를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일원상 서원문에서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한다.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일원’일 수 없다. 소태산 대종사는 게송을 내리신 후,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대종경> 성리품 31장)”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반야가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성품의 진체를 보는 지혜이니, <금강경>도 관조로써 깨쳐 얻어야 한다.

사량으로 얻으려고 하면 그 생각에 잡힐 것이고, <금강경>에서 얻으려고 하면 <금강경>에 잡힐 것이다. <금강경>의 역할은 진리를 관조로써 깨쳐 얻기 위해 모든 사량을 쳐내는 것일지 모른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