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예수교 (2)
313년에 로마로부터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가 권력을 등에 업게 되자 교회는 순수성을 잃고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일강 유역 사막지대에 수도원이라는 공동체가 생겼다. 소위 모나스티시즘이다.

초기에는 교회 내에 만연한 부패와 관습적 예배 등 맥빠진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점차 로마의 조세제도, 세리나 토지관리인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각성된 농부들의 움직임도 수도원 문화의 형성을 촉진했다. 영어로는 이들을 앵커라이트(anchorite, 은둔자)라고 부른다. 독신·가난·명상생활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다.

은둔자들 중 성 안토니우스는 수행운동의 건전하고 합리적인 조사(祖師)가 되었다. 그가 머물렀던 곳에는 지금도 다이르 마리 안토니우스 수도원이 있다. 그 후 성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46)는 개인적인 수도의 한계를 절감하고, 공동체적 규칙 생활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수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나일강 동편의 버려진 동네에 수도원을 짓고 담을 높게 둘러쌓았다. 그는 이곳을 타벤니스(Tabennis)라고 불렀다(318년).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도된 기독교 수도원 공동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은 의식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공동생활의 개혁을 시도한 역사적 사례다. 수도원 제도는 공동체의 생태를 모색하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실험이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농사기술을 개발하거나 기도와 명상을 하고 음악을 작곡했다. 사본의 복사, 또 민중들을 위해 가르치고 간호하고 봉사하며, 수많은 환상을 구체화했다.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이는 
굴을 파야 나올 수 있다. 
여럿이 힘을 모아야만 가능하다.

G.I. 구르지예프 공동체 (1)
여러 부처님들 가운데서도 구르지예프는 공동체 공부를 확실하게 강조했다. 이 점은 소태산 대종사와 비슷하다.

구르지예프는 여러 수피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수피 공부법은 개인적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그룹-메소드다. 그 자신도 자기의 공부법을 ‘학교’ 공부라고 했다. 그는 그런 옛 수피들의 오래된 테크닉들을 갈고 닦아 시대에 맞게 새로운 맞춤복으로 내놓았다. 모여서 하는 그룹형 공동체 공부는 규모가 작으면 그런대로 지낼 수 있지만, 규모가 커지면 그 나름대로의 문제가 생긴다. 다름 아닌 경제적 문제다. 제자들은 많은 돈을 들고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니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없고, 일해서 수입을 마련해야만 한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경제적 문제도 그렇지만, 제자들의 신분상 법률적이고 사회·정치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해결하는 것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제자들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

구르지예프는 1922년 7월경 영국에 정착하려던 계획이 좌절된 후, 몇 개월간의 탐색과 협상 끝에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60㎞ 떨어진 폰테블러 부근의 푸리우레이 성을 얻고, 그동안 독일에 잔류하고 있던 제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그 기간을 “내 생애에 있어서 정신 나간 시절 중의 한 때였다”는 말로 당시 궁지에 빠져 어쩔 줄 모르던 상황을 표현하였다.

그는 그 공동체(학교) 건물을 유지하려고 카펫과 기름 장사를 하면서 노심초사하였고, 또 여러 번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 학교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그를 외면하였는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인간을 동굴의 뒷벽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로 비유하였는데, 구르지예프는 인간의 상황을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간주하였다.

의식이 열려 그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은 땅속에 굴을 파야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데, 이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고 여럿이 힘을 모아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그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먼저 그룹을 만들어 공동체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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