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예수교 (1)
예수의 가르침은 시스템적인 것과는 좀 다르다. 그의 긴박한 생존의 모습에서는 그럴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가 12살 때쯤 사람들의 이목에서 사라진 뒤 30세 정도에 공생애에 들어올 때까지, 그 중요한 시절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자신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 시켰는지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그러나 그런 심오한 영성을 가진 인물이, 그런 종교적인 천재의 자질을 가진 청년이 소위 말하는 쿰란(에세네) 공동체 같은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사해 지역의 쿰란은, 20세기 중엽에 발견된 사해 사본과 그 발견으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쿰란 공동체의 부상은 신약성서 연구에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그 문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상과 생활 모습들이 신약성서에 나타난 것들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 공동체 사이의 유사성이나 연관성에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또 현재로서도 불가능한 모양이다.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의 연관성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들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나, 세례요한이 어느 정도 쿰란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쿰란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로 유입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어렸을 때 쿰란 공동체에 의해 입양되었다는 설이나, 요한이 쿰란 공동체와 밀접한 인척 관계가 있었다든가 하는 설이 있는 것을 보면, 쿰란 공동체와 예수 사상의 연결 또한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학자들의 추측이지만, 사해 근처의 쿰란 유적지에서는, 그런 불모지에 집들을 짓고 책을 필사하는 일 등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물 저장고의 크기를 보면 약 300명 정도가 공동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추리한다. 수로를 이용해 산에 내리는 빗물을 끌어들여 저장하여 사용했고, 여름에는 아인페쉬카 샘을 통해 물을 공급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문화 공동체’나 
‘대망공동체’는 이념상의 공동체

바울은 성경에서 어떻게 보면 12제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신약성서〉 27개 텍스트 중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이고, 바울이 코린토스(고린도) 시(市)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고린도전서’ 9장 16~27절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서원(誓願)의 글이 될 만한 명문이다.

바울을 ‘그리스도교 제2의 창시자’라 칭하기도 한다. 물론 예수는 그리스도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리스도’니 뭐니 하는 말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자신의 소신대로 주저하는 바 없이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삶과 교훈,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는 종교라는 면에서, 그 시스템을 만든 바울을 제2의 창시자로 볼 수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2008년을 ‘바오로 탄생 2,000주년’으로 기념한 바 있다. 그리스어로 ‘파울로스’를 영어로는 ‘폴’, 한국 개신교에서는 ‘바울’, 한국 가톨릭에서는 ‘바오로’라고 발음한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기독교는 바울 신학을 추종해왔다. 그리고 부활 신앙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며 세계에 전파하고 일정의 효과를 거두었다.
곧 바울은 예수를 유대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생각한 ‘생명문화 공동체 운동’(문동환 목사)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예수는 ‘생명문화 공동체’, 곧 과부·고아·떠돌이들도 평화롭게 함께 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추구했다.

“바울은 예수를 계시록 적인 메시아로 오인했고, 예수가 언젠가 재림해서 메시아 왕국을 이룩할 것이라고 믿고, 이방인까지도 메시아 왕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를 기다리는 대안 공동체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사상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학의 기반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가 세상의 정치와 결합하면서 엉뚱한 종교로 변질되어 예수가 이룩해 놓은 생명문화 공동체 운동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종교가 되고 만 것이다.”(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

생명문화 공동체나 대망공동체는 이념상의 공동체였다. 공동체의 개념은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시간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우두머리로 모시고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을 의미한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는 투쟁의 대상이 사라져버려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상태가 되었다. 순교를 전제로 생각하고 교회 모임을 했던 사람들은 세속에 대한 철저한 거부반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교회가 권력을 등에 업게 되자 신도들의 삶은 해이해지고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2년 8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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