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신뢰가 그 바탕이었다면 삼권분립을 할 필요도, 선거로 공직자를 선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시스템을 믿었다. 시스템이 선(善) 작용을 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 만들어진 시스템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도 ‘불교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를 표방한 이데올로기들은 한 번 조직되고 시스템화하면, ‘진리’를 파괴하기 시작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빌라도 총독처럼, 본질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또 다른 스토리가 전개되겠지만, ‘진리’는 속성상 시스템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동사의 형태이기 때문에 명사화할 수 없어서다. 명사라는 틀로 액자를 만드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도그마요,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진리를 도그마화 하여 하나의 믿음의 체계로 바꿀 수는 없다. 진리는 우리가 체험해야 할 바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예수는 어떤 시스템(교회운동, 교회조직) 등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간을 죄인으로 인식하기는 했지만, 그 죄의식을 빙자해 어떤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곧 그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기독교라는 시스템은 주지하듯 바울에 와서 그 성격을 공고히 하였다.

예수의 사망 후 제자들이 모여 그룹을 형성한 이유는 그들 나름의 남과는 다른 공통적 신념이 있었고, 그 신념을 지속하고 싶었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그룹은 종교화 되었다. 그 신념의 내용에는 즉각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할 만큼 강력한 에너지가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속성상 
시스템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진리를 도그마화 하여 
하나의 믿음의 체계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을 원인으로 ‘초대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현재의 교회라는 제도화된 조직 속의 한 단위 교회가 아니고, 아무런 위계질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교리 같은 것이 없는 세속 모임이었을 뿐이다. 후에 그런 모임이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 박해는 교회조직 성장의 원동력으로 변질돼,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된 부수 효과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란 특별히 예수일 수 만은 없다. 그리스도란 개인적인 이름이 아니다. 하나의 정신적인 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치 ‘붓다’가 고타마 붓다 한 사람일 수 없듯이. 예수는 그리스도 중의 한 사람이요, 고타마 붓다도 여러 붓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종교가 조직화 되고 체계화되면 지도자들이 생기고 또 추종자들이 따른다.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을 유혹하고 심지어는 착취도 시도할 수 있다. 곧 그 조직 안에 이기심이라는 폭력의 씨앗이 갊아 있는 것이다. 그것에 복종하는 것도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서양의 가치체계를 파괴한 철학자로 F.니체가 있다. 그는 활동 초기에 좋아하고 추종하였던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뛰어넘고, 기독교 윤리나 과학 같은 문명 세계의 성과를 전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망상이라고 생각하며, “삶을 몰락시키고, 약화시키고, 피곤하게 하고, 유죄 판결을 받게한다”고 폄하했다. “그것들이 남긴 성과는 모조리 좌초됐으며, 특히 신은 죽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몰락했다”고 했다.

니체가 개인의 생각으로 시스템을 파괴했다면, 행동으로 보여준 시스템 브레이커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는 1929년 8월 2일 네덜란드의 집회에서 ‘동방의 별의 교단’을 해체하면서 ‘진리는 시스템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불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선종이라는 옷을 입으면서 시스템 브레이커들이 양산되었다. 선승들은 ‘존재의 집’이라는 언어를 부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중국 선종의 할아버지 격인 보리달마도 시스템 브레이커다. 시스템이란 ‘나를 따르라!’는 사람들이 고안한 것인데, 시스템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넓은 안목에서 보면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시스템에 대해 별로 매력을 못 느낀 것은 인도의 불교뿐만이 아니라 브라만교, 자이나교도 마찬가지였다.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슈라마나(사문: 집을 떠나 수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집단이나 사회를 거부하는 데 있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공동체를 떠나 홀로 고행의 길에 나서는 것이 사문의 전통이었다. 그런 전통 때문에 사문은 개인의 구원인 개인의 깨달음에만 목적이 있었고 사회구원이라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

[2022년 10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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