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불교의 탄생 분위기는 사회집단의 이해관계에서는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세속화되어가면서 집단을 형성하고 또 나름대로 삼보(三寶)를 존경의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자기모순이 생기게 되었다.

유대교 전통의 종교는 좀 다르다. 황량한 사막의 분위기 때문인지 공동체의 결합성이 강하다. 그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이익을 당한다. 그래서 유대교 전통의 종교는 타인에 대해 선교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물론 힌두교 계통의 인도 종교들도 포교 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문화를 바꾸려는 의도보다는 포섭하고 흡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교가 습합(習合)의 종교로 다른 문화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데는 명수가 된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속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자재하게 된다.”(〈임제록〉, 14~17)

참으로 엄청난 주문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열반하면 뒤에 남은 사람들이 “빨리 이 땅에 돌아오시어 임제 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주소서”라고 축원을 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임제의 눈에는 시스템 메이커도 브레이커도 없다. 다른 사람이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경계에 끌려다니거나 흔들리지 말고, 역경계나 순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일단 벗어나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관념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했던 임제의 철저한 반권위적인 삶은, 모든 허구의 숭배에 대한 엄중한 비판과 함께, 교권 체계 또는 교의적인 사슬에 얽매이지 않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이 세상이 망해 다른 책이 다 불살라 없어져도 〈임제록〉 한 권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 하였는가 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조차 ‘신을 죽여 버려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 종교의 종조조차 죽여 버리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 종교의 창시자라는 것은 최고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감히 넘어서지 못하는 장애와 구속이 된다.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 또는 ‘초기 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했어도, ‘죽여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은 임제가 처음이고 마지막일 것이다.

임제만 시스템 브레이커는 아니었다. 조주 종심 선사는 “부처가 있는 곳도 그냥 지나가라. 부처가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라” 했고, 운문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다는 고타마 붓다를 두고, “그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놈의 주둥아리를 찢어 개에게 던져주어 세상의 소란을 미연에 막았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를 만나야 부처를 죽이지, 만나지도 못하고 누가 부처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누구를 죽이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임제는 “큰 선지식이라야만 비로소 감히 부처와 조사를 비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명한 공안 ‘단하소목불(丹霞燒木佛)’의 주인공 단하천연(天然)도 시스템이고 뭣이고가 없는 지존의 수준에서 놀았던 인물이다.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날 밤, 혜림사에 머물던 그가 절 주변을 돌며 땔감을 찾았지만 구하지 못하고 불당에 들어가 목불을 하나 들고 사리를 얻겠다고 불을 지핀 이야기다. 

사리를 얻을 수 없다면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다른 나무토막과 무엇이 다른가. ‘영업용’ 장식이니 별 중요한 물건은 아닌 듯싶다. 하기야 언젠가 무비 스님도 현재의 불교를 반성하자면서 ‘대웅전은 불상 창고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였다. 단하 선사는 불상 같은 형상에 걸림이 없고 자유로웠다. 이런 이야기는 일종의 고급 블랙코미디겠지만 조주 스님도 그 누구에 뒤지지 않았다.

조주는 “만물 가운데 무엇이 가장 견고합니까?”라고 묻는 학인의 말에 “욕을 하려거든 서로 주둥이가 맞닿을 만큼 해야 하고, 침을 뱉으려거든 너에게서 물이 튈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불법에서 견고한 것을 찾는 것은 이처럼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것이란 말이었을 것이다. 견고한 것을 묻는데 그런 식으로 답하는 재치도 놀랍지만, 욕을 하고 침 뱉는 행동을 이미지화하기 위해 선택한 표현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살맛을 불어넣었고 지리멸렬한 불교계에 생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유머인지 뭣인지, 초탈한 사람의 심경은 범부로서 헤아리기가 어렵다.

[2022년 10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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