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교무
김도현 교무

[원불교신문=김도현 교무] “수보리야. 이런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낸다. 마땅히 색에 주한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주한 마음을 내지 말아라.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금강경> 10장)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우리 <정전> ‘무시선법’에서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인용되었다.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 <금강경> 10장의 흐름을 따라서 읽어보자.

먼저 여래는 ‘연등불에게 받은 법이 없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인 선재동자는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았다. 석가모니의 성불은 예고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석가모니는 ‘받은 법이 없다’고 말한다. 선재동자가 공부의 표준으로 삼은 마음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있는 법이 있고 그것을 연등불에게 얻었다면, 그 법을 얻은 사람은 얻었다는 상이 생길 것이고 아직 얻지 못한 사람은 얻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하는 법은 성취를 향한 조바심도 이루었다는 자부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어서 ‘불보살이 장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장엄의 방식은 규정될 수 없다. 사랑과 자비, 봉사심과 감사심 같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꾸며도 이러한 것이 장엄이라고 규정되면 비교심과 욕속심 등이 따라올 것이다. 더욱이 불토는 이미 청정하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세상을 다시 어찌 꾸밀 것인가? 

이렇게 안으로 얻을 법도 없고, 밖으로 꾸밀 장엄도 없다. 그러면서도 생생약동하게 살아있는 마음을 경계에 따라 일으킨다.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빈 마음, 주한 바 없는 마음이다. 동시에 경계에 따라 알맞은 분별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청정한 마음이다. 이러한 청정한 마음을 내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땅히 색·성·향·미·촉·법에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 경계를 대하여 주한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은 곧 청정한 마음을 내서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에도 잡히지 않고 우리의 본래 성품을 발현시키는 것’이라 하고 싶다. ‘나’라는 중력에서 벗어난 마음을 가히 ‘청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오염되어 발현된다. 나라는 생각, 나와 너의 분별, 여기에서 나오는 욕심들, 나의 가치관과 우리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한 시비이해 등에 우리의 마음은 오염되어 있다. 

마음을 내지 않으면 모를까 마음을 내면서 어찌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아득하다. 그러니 이런 마음을 내는 보살이라면 그 몸이 수미산같이 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022년 10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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