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분야를 막론하고 서로 감동을 주고받지 못하면 생명력은 그만큼 짧다. 시장에 출시된 제품에서부터 모든 정신·물질적 생산물이나 재화까지 예외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의 오랜 전통을 지닌 유럽에서는 어떤가? 관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음악가나 예술가가 설 땅은 매우 좁다. 아니, 무대에 오르기도 버겁다. 그러자면 무대 뒤에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훈련을 하느냐가 이를 대변해 줄 뿐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의 프리미어리그(EPL)에서 활약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동과 그에 대한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훈련이라 하면 특정한 기술이나 기능을 오랫동안 익혀 몸에 배게 하는 일련의 활동이 떠오른다. 따라서 논산훈련소, 군견훈련소, 사관학교도 훈련하는 기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중 사관학교는 훈련과 교육을 병행한다. 사관학교는 군의 전인적 지도자를 양성하기에 다른 훈련기관과 구별된다.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는 왜 훈련법을 내놓았는가? 그 본의가 무엇인가? 종교에서 교육이 아닌 훈련을 강조한 뜻은 어디에 있는가? 

소태산 대종사가 창교할 무렵의 사회보다 지금 사회는 변화가 심하다. 과연 이 시대, 아니 미래에도 훈련이 모든 사람에게 절실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기훈련 11과목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을 곧잘 한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 재세시에도 11과목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을까? 왜 훈련과목을 이렇게 예시해 준 것일까?’ 이 시대뿐만 아니라 미래 시대에 걸맞게 하려면 하나하나 점검해 봐야 한다. 과연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동기유발이 되는지, 훈련의 제반 인프라가 감동을 줄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 소프트웨어인 훈련 프로그램이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심하게는 세상에 내놓아도 모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할 정도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는지, 그런 연구개발을 해본 적이 있는지, 우리의 훈련법대로 하면 교도들이 감동하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받아본 적이 있는지 등도 돌아봐야 한다.

물론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대로면 감동을 주어야 하고,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교법대로 하면 마치를 든 공장도, 주판을 든 점원도, 정사를 하는 관리들도 모두 감동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런 감동이 현실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동을 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종교는 인류에게 종교가 어떤 감동을 얼마나 주었는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도 일상으로부터, 인간의 삶의 질곡으로부터 작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지 못하면 설 땅이 없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해 종교계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한 교도 수의 변화를 넘어 종교 자체의 필요성에 회의적 반응을 낳게 되었다. 종교가 종전의 권위나 위세를 내세우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많이 변하고 있다. 어제까지는 종교를 위해 종교가 존재했다면 이제는 인간을 위한 종교라야 존립할 수 있다. 왜 종교가 필요한지에 대해 종교가 성실하게 응답해야 하고, 그 응답이 감동을 줘야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종교가 인간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러나 그 감동은 특정 종교에 몸담은 이들만 읽을 수 있는 악보가 아닌, 누구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공유지대에서 찾을 수 있는 감동이어야 한다.

/원광대학교

[2022년 10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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