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광 명예교수
김혜광 명예교수

[원불교신문=김혜광 명예교수] 일반적으로 고전은 오랜 시간 동안 인류에게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이나 문헌을 지칭한다. 그러한 고전이 그 가치를 유지하려면 독자와 긴 호흡이 이어져야 한다. 

길게는 100년 전 아니면 1,000년 전에 제작되었지만, 아직도 독자와 접촉하는 저작은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독자의 다양성만큼이나 고전과 호흡하는 양상도 얼마든지 다양하다. 한편으로 독자와 이런 긴 호흡을 하도록 그 고전에 대한 가독력 제고를 위해 때로는 해석과 주석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가 아는 동서양의 고전은 문학 작품에서부터 다양한 장르에 걸쳐 그 수와 종이 많다. <원불교 교전> 속에는 직·간접적으로 불가, 유가, 도가 등의 경서는 물론 다양한 동양의 고전이 인용되거나 해석되고 있다. 때로는 단어 하나에서부터 구절, 명제, 문장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예컨대 <원불교 교전>에 담긴 최초법어는 소태산 대종사가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평천하의 도의 틀을 적용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전혀 다르고, 심지어 목적하는 바도 다르다. 나아가 <대종경>에 그와 같은 동양의 고전을 들어 제시한 사례도 많다. 소태산 대종사는 비록 고전을 원용(援用)은 했지만, 의미체계는 다르게 제시했다. 삼학(三學)도 불가의 것을 원용했지만, 내용은 불교의 계·정·혜와 다르다. 이렇듯 소태산은 ‘고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쳐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묵시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물론 고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리고 지금, 앞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과제와 전망을 묻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일찍이 미국 시카고 대학의 허친스(Hutchins, 1891~1977)가 말한 위대한 고전교육(Great Book Education)을 보면 ‘고전교육은 고전을 통하여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대화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고전은 박물관에 전시품처럼 될 수도 있다. 

물론 고전 속의 글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해석을 한다 해도 과연 그것이 오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득력을 담보하지 못하면 그저 고전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전이해는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 H. Carr, 1892~1982)의 말처럼 사실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고전은 대서사, 거대담론에 해당할지 모른다. 시대에 걸맞게 작은 이야기로 담아내 풀어내는 것이나, 지금 여기서 그리고 내일에 공유와 설득력 여부, 시대와 호흡하는 것 역시 사람의 몫이다. 아무리 고전을 원문에 충실하게 해석할지라도 고전이 저작된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른 만큼 이해에 여러 가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고전을 읽게 되면 고전은 고전일 뿐 나와 무관한 것이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고전을 보되 자기화,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불가, 유가, 도가의 많은 경전을 읽으라는 이유는 바로 그저 지적 호기심이나 읽고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서 과거 성현이나 소태산 대종사가 왜 이런 경전의 가르침을 남겼으며, 만일 그런 성현이 살아 있다면 지금 여기서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원광대학교

[2022년 11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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