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2007년 10월, 패션 잡지에 상반신 누드 사진을 실어 파문을 일으킨 국립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김주원 씨가 감봉 1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일이 있었다. 김 씨가 ‘발레단 이외의 예술활동을 할 경우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복무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김 씨는 “순수 예술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가질 기회라고 판단했다. 내 몸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싶었다”고 했다. 

복무규정이 타당한 것인지 또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것인지, 그런 낡은 관료적 잣대로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 특히 문화 예술계의 변화를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인지는 문외한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규정들이 올가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건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틀을 깨기 위해, 자유를 갈망하기 위한 것은 예술이나 종교나 다름없다.

굳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들먹일 것도 없다. 처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조롱의 대상들이었다. 정통 화가의 길을 걷지 않은 사람들이 더 그랬는지 모른다.

피카소가 스페인에서만 우물쭈물 했으면 그냥 평범한 일개 화가로 막을 내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파리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고 사실주의의 평면 회화를 과감히 해체하지 않았다면 현대미술의 표현과 등장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사도라 덩컨이 토슈즈를 벗어던지고 반라의 차림으로 무대에 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현대 무용이 가능했을 것인가. 모차르트가 대위법이라는 음악의 고정된 형식을 깨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선율 대신 장송곡 같은 무거운 종교음악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쇤베르크는 악곡의 중심이 되는 조성(調性)을 버렸다. 그래서 마침내 일정한 조(調, C조 D조 등)가 없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정확히는 수녀)들을 데리고 크림전쟁에 참여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여자가 전쟁에 참가하느냐며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총에 맞아 죽는 병사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군인들이 더 많았고, 그 전쟁에서 간호사들의 헌신으로 귀한 생명들을 구해내자 모두 그녀를 찬양했다.

남성복처럼 간결한 치마가 아닌 팬츠를 입었던 가브리엘 샤넬의 복장에 대해서도 시비가 있었다. 하지만 샤넬은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갔다.

전변하는 세상을 액자 속에 넣어 둘 수는 없다. 그 틀을 깨면서 언제나 자유로운 몸짓을 원할 때 참다운 예술이나 진실된 종교로 서 있을 수 있다. 일생을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인간은 특정 시스템에 속한 하나의 대상물로 전락한다. 자기 존엄성을 깨우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불교도 어쩔 수 없이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만들기는 했지만, 집단 안에 모여 수행을 하는 형식을 갖기는 해도 혼자 수행하고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김훈, 〈칼의 노래〉) 왜군들이 조선에 올 때는 군인이라는 집단명사로 자기들의 국가를 위해 왔던 것이겠지만, 죽을 때는 일본 군인으로서 죽는 게 아니라 가족과 헤어져 외롭고 고통스러운 슬픈 개인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시스템에 싸인 종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시스템으로 보호되고 둔갑 됐을지라도, 개인에서 출발해 결국 개인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시스템은 개인의,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것일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시스템에서 나오는 권력에 한눈을 팔면 수행은 물 건너간다.

절집도 수행하는 사람들이 주인이다. 그 수행승들을 위해 원주도 있고 총무원도 있다. 총무원이나 교정원 같은 행정조직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그 조직의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판승이 없으면 그 공동체가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사판승’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종교에는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또 그 시스템의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그것을 파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한 쪽에서의 파괴가 다른 쪽에서는 완성이요, 한 쪽에서의 완성은 다른 쪽에서는 파괴다. 모든 일에는 완성과 파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통하여 하나가 된다. 도를 깨친 자만이 서로 통하여 하나 되는 것을 안다.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나와 다툰다./ 법을 말하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다투지 않는다./ 세상의 여러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승인한 것을 나 또한 ‘없다’고 말한다./ 세상의 여러 사람이 ‘있다’고 승인한 것을 나 또한 ‘있다’고 말한다.” (〈잡아함경〉, 2권 37)

“청련이나 홍련 또는 백련이/ 물속에서 생겨 물속에서 성장하고,/ 물 위로 피어나면서도 물에 더럽혀지지 않듯이,/ 여래는 진실로 세상 속에서 성장하고 세상을 이겼으나/ 그러면서도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았다./ 진실한 수행자는 어떤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다.”(〈테라가타〉, 1217)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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