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교장
이진희 교장

[원불교신문=이진희 교장] ‘라떼(나 때)는 말이야’로 상징되는 ‘꼰대’라는 은어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꼰대는 자신의 나이, 직위, 경험을 앞세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젊은이나 아랫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말한다. 

꼰대는 경상도 사투리인 ‘꼰데기’와 프랑스어 ‘콩테’에서 유래했다. ‘꼰데기’는 번데기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나이든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변해서 꼰대가 되었다고 한다. 또 백작을 뜻하는 프랑스어 ‘콩테’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서 꼰대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가 스스로를 콩테라 명명하자, 이를 비웃는 사람들이 그들을 꼰대라 부르며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꼰대는 영국 BBC방송에서 오늘의 단어로 소개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이를 본 세계의 네티즌들은 흥미롭게도, 국적을 불문하고 그들 주변에 꼰대가 많이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빠 이름을 꼰대로 바꿔야겠다. 시어머니의 새 이름을 찾았다’ 등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꼰대는 주로 회의나 모임에서 쉽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경험만이 최고인 양 일반화하고 나이 어린 사람, 지위 낮은 사람을 가르치려고만 한다. 때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법조문이나 기타 행정의 디테일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면서, 스스로 좌중의 대중보다 더 잘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주려는 듯 우월감에 취해 있기도 한다. 무엇보다 회의에서 절반 이상의 발언을 홀로 독점하고, 문제해결 방안을 마련하고자 모인 회의에서 자신이 제일 먼저 의견을 냄으로써 다른 이들의 입을 미리 틀어막는다.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권위로 누르려 하며, 말로써 상대를 제압해야 자신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이만 들었지 철이 없는 못난 사람으로, 배움과 성찰을 멈춘 설익은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꼰대냐 멘토냐의 기준은 
타인과의 소통 능력과 
배려심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누군가 한 번쯤 이런 꼰대의 행태에 반발, 브레이크를 걸 만도 하건만 그가 조직의 리더인 경우 권위주의 회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 회의가 아니라 훈화 말씀의 연속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회의의 기본은 소통과 공감인데,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회의가 언제 끝나는지 시계만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유념해야 할 부분은, 꼰대는 자신이 꼰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는 스스로를 멘토라고 착각한다. 이렇듯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떨어지다보니 말이 많아지고 자신의 방식대로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런 꼰대에서 벗어나 멘토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인 멘토(Mentor)에서 유래하였다.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한 20년 동안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돌보았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선생님처럼, 때로는 전쟁에 나아간 아버지를 대신해 자상하게 가르치고 고민을 들어줬다. 그 후 원래 고유명사였던 멘토라는 그의 이름이,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라는 의미의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결국 꼰대냐 멘토냐의 기준은 타인과의 소통 능력과 배려심을 지니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멘토는 타인과의 생각 차이를 수용하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타인의 삶을 도와주려고 한다. 그래서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타인에게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려는 꼰대와 다르다. 멘토는 타인이 도움을 청할 때, 비로소 신뢰를 바탕으로 현명한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를 바르게 이끌어준다. 그러니 이제 좀 기다리면 어떨까? 상대가 들을 준비를 하면서 조언을 구할 때까지 말이다.

/한겨레중고등학교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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