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이자 동·하선의 선원
공회당은 초창기 동·하선을 나던 선원이자, 매 예회와 야회를 여는 법당이 됐다. 소태산 대종사가 공회당에서 남긴 법문으로는 원기26년(1941) 동선 중인  1월 28일에 ‘게송’과 ‘무시선의 강령’, 2월 28일에 ‘일원상 법어’가 있으며, 원기28년(1943) 1월 동선에서는 ‘교리도’를 발표했다. 

또한 〈대종경〉 수행품 17장에 양도신이 바느질을 하면서 약을 살피던 상황을 설명하며 동할 때의 일심공부를 문답했던 장소이고, 신성품 14장에 “졸고 있는 것이 보기 싫기가 물소 같다”고 꾸짖으며 법문했던 곳이다. 부촉품 8장에서 외학과 외지보다 본래 서원을 세우도록 당부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공회당은 정기훈련인 동·하선의 선방으로 활용됐는데, 원기10년(1925) 하선을 시작으로 소태산 대종사 열반 해인 원기28년(1943) 하선까지 35회가 시행됐다. 

소태산 대종사는 훈련기간에 성리를 설하며 자주 문답했는데, 원기12년(1927) 동선 중에는 매일 아침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의두로 문답했다. 또한 동선 해제 3일 전부터 3일간은 밤시간에 성리문답 시간을 가졌고, 이 시간은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주도했다.
첫날은 진공 자리를 증거 하는 여래선 도리로, 다음날은 진공과 묘유 자리를 증거 하는 조사선 도리로, 마지막 날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를 말로 분명히 설명할 줄 아는 의리선 도리로 문답이 진행됐다. 그리고 양성과 솔성을 물어 막히지 않으면 견성인가를 내렸다.

문답 시에는 반드시 거수로 발언권을 얻었다. 이때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주제와 방향이 빗나가면 소태산 대종사는 법상 위의 벨을 울려 중단시켰다. 문답 시 가장 어려운 관문은 의리선이었다. 여래선과 조사선은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의리선에는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의리적으로 분명히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이정 종사는 당시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물음에 “오직 한 기운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포수가 허공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쏴 맞췄을 때 포수도 기러기의 아픔을 느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안이정 종사는 말문이 막혔고, 이어 깊은 의단을 뭉치게 됐다고 전해진다.

동·하선 동안의 ‘선원일지’를 살펴보면 아침은 좌선, 오전은 경전, 오후는 일기와 독서, 밤에는 상순은 염불, 중순은 회화, 하순은 강연으로 두 시간씩 하루 여덟 시간의 전문 훈련 과정을 지냈다.

현재의 공회당은 왼쪽으로 약 1m 정도 허물어 재건축됐다. 초기에는 익산성지 안쪽에 송대 외의 건축물이 없었으나, 이후 소태산대종사성탑과 정산종사성탑, 종법원 등이 들어서면서 새로 길을 내야 했고, 길을 내 넓히면서 공회당 일부분을 허물게 됐다.

[2022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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