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원에서 종법실로
종법실은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22년(1937)부터 원기28년(1943) 열반 때까지 6년간 주석했던 곳이다. 종법실을 건축하게 된 배경은 원기12년(1927) 4월 27일에 열린 제5회 평의원회에서 선원교무 이춘풍이 부인선원(婦人禪院) 건립을 제안하면서부터다. 

당시 동·하선을 할 때마다 여자 선객들이 공부하고 거주할 만한 숙소가 없어서 전음광의 사가를 빌려 써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평의원회에서 부인선원을 짓기로 결의해 그해에 도치원 아래로 3칸의 맞배지붕을 지었으며, 음력 5월 6일~ 8월 6일 이곳에서 정묘하선을 지냈다. 하지만 이듬해 초에 이 부인선원의 양쪽을 달아내어 5칸의 기와집으로 증축하게 된다. 그리고 제1대 제1회 기념총회(음력 3월 26~28일)를 이곳에서 개최했다.

종법실의 처음 이름은 제1회 기념총회가 열리는 꽃피는 봄날에 지었다고 해서 영춘원(迎春院)이었으나, 이후 금강원을 지어 소태산 대종사가 기거하게 되면서 건물 명칭을 원에서 헌(軒)으로 낮춰 부르며 영춘헌이 됐다(소태산 대종사가 기거하는 금강원보다 낮춰 부른 것이다. 혹자는 영춘헌이라고 낮춘 호칭보다, 청하원이나 정신원처럼 영춘원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후 신영기가 사가(현 구정원)를 희사함에 따라 사무업무 장소가 신영기 사가로 이동했고 소태산 대종사가 이곳에 주석하게 된다. 

종법실은 일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으로 목조 팔작 기와집 6칸 겹집이며 90.63㎡다. 4개의 방 사이에 미닫이문을 달았으며, 임의로 들어내 예회를 보거나 기념례를 지내는 등 다목적용으로 사용했다. 평상시에는 칸을 막아 낮에는 사무실로 밤에는 숙소로 사용했다.

평면 구성은 정면 가운데 2칸이 주 출입문이며, 들어서면 5,400×1,500㎜ 규모의 공간에 툇마루가 설치돼 있다. 마루를 중심으로 정면에 방 2개, 좌측에 마루방과 온돌방이 있으며, 우측에 방 한 개로 총 5개의 방으로 구성됐다. 정면에 배치돼있는 2개의 방과 좌·우측에 있는 방은 공간의 활용성을 고려해 미닫이문으로 개별 공간과 대형공간으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마루방과 두 번째 방 사이의 문은 사용하지 않고 문 뒤에 가벽을 세웠다. 소태산 대종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기25년(1940) 4월 중순부터 종법실 뒤편에 목욕실과 화장실을 신축해 5월 중순에 준공했다. 종법실 후면은 제자들이 아궁이를 지피고 목욕물을 데우며 소태산 대종사를 보필하던 신성의 터전이기도 하다.

또한 종법실 뒤채 옆(현 공회당과 종법원 사이의 마당)에는 황정신행이 원숭이를 키우는 우리를 만들어, 소태산 대종사가 때때로 구경했으며 열반 전까지 이 원숭이 밥을 주기도 했다. 근동 사람들과 학생들(이리농림학교 실습생 등)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일종의 동물원 역할을 했다.

[2022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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