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물고기가 물을 잊고 살아가듯, 사람은 도를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물고기가 한순간도 물을 떠날 수 없듯, 사람은 한순간도 도를 떠날 수 없다. 이미 도와 하나로 스스로 존재하니, 도와 한 몸으로 움직인다. 어느 하나 멈춤도 없이, 저 별의 운행처럼 그렇게 오고 간다.

장자의 이야기 속에는 ‘유(遊)’가 여러 번 나온다. 일반적으로 ‘노닐다’로 번역하는데, 유희(遊戲)나 유람(遊覽)의 느낌으로 이해된다. 장자의 글에 나타난 예술적 감각과 정취를 생각하면, 이러한 해석이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요유(逍遙遊)’에서처럼 장자가 ‘유(遊)’를 말할 때엔 ‘길(道)’을 따라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만약 온 세상이 온통 도 하나라면, 그 길을 자유롭게 오고 가는 만물의 모습이 바로 ‘유(遊)’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너무나 자유롭게 헤엄치는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신의 유희로서 ‘노님’ 또한 괜찮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도와 한 몸인데, 노닐지 못하는 것이 무엇 있으랴!

도와 하나 되어 모든 것을 잊으니, 언제나 함께한다. 장자의 이야기 속 지인(至人)은 서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미소 지으며 담담히 말한다. “우리 중에 누가 서로 함께함이 없는 곳에서 함께할 수 있고, 서로 위함이 없는 곳에서 서로 위할 수 있을까? 우리 중에 누가 하늘로 올라가 안개 속에서 노닐고 빙빙 돌면서 무한성 속으로 들어가, 서로를 잊은 채 영원토록 살 수 있을까?”

도와 하나인 지인에게는 죽음도 그저 길 위를 걸어가다 문득 작은 꽃을 만난 듯한 일이다. 지금 찰나의 순간이 곧 영원한 시간과도 하나이기에, 삶도 죽음도 영원한 시간 속에는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다. 작은 꽃이 바람에 흔들리듯, 바라만 보아도 그저 좋다. 정말 중요한 것은 모두 함께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일이다. 그 길 위에서 만난 꽃처럼, 삶은 잠시 지나온 노님이다.

물고기는 물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물이 말라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될 때, 비로소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자가 보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도가 이렇게 언제나 어디에나 함께 하는데, 그 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며, 도를 잊고 산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가득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소리가 들린다면 반드시 있는 그 무엇, 항상 접촉하고 있지만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 무엇, 바로 공기처럼, 그렇게 도는 함께 있다. 그 도는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행하고 있다. 마치 기차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듯, 우주 전체가 한 몸으로 움직인다. 열차 속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지만, 그 열차와 함께 빠르게 달려가듯, 일체(一體)로서의 도는 온 우주와 함께 무한하게 노닌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가는 듯 하지만, 모든 존재의 이유를 담고 있다.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1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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