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법 교무
김지법 교무

[원불교신문=김지법 교무] 도(道)와 둘이 아니라면, 생사(生死) 역시 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언제나 함께 있다면, 그저 하늘의 뜻과 함께할 뿐이다. 오히려 삶의 수고스러움을 놓아버리는 죽음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이 몸은 바람에 따라 일어난 물결처럼 잠시 생겨났다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일렁이는 물결의 모양이 바뀐다 한들, 그 마음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다.

장자는 죽음을 앞둔 지인(至人)의 이야기를 즐거운 듯 속삭인다. 한 지인이 병에 들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 지인은 “훌륭하도다! 저 조물자(造物者)여! 나를 이렇게 뒤틀린 존재로 만들고 있다니. 그는 나를 구부러뜨려 등을 튀어나오게 하고, 척추로 이어지는 다섯 가지 관상 기관을 위로 솟아오르게 했다. 내 턱은 배꼽 아래로 숨고, 내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으며, 내 목의 우툴두툴한 뼈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음(陰)과 양(陽)의 기운이 모두 어그러졌도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것이 싫은지 물었다. 지인은 “아니, 내가 왜 싫어하겠는가? 저 조물자는 차츰차츰 내 왼팔을 빌려 그것을 수탉으로 변화시킬 테지. 그러면 나는 그 덕분에 새벽에 닭 울음소리를 듣지 않겠나.

그는 차츰차츰 내 오른팔을 빌려 그것을 석궁으로 변화시킬 테지. 그러면 나는 그 덕분에 저녁으로 구운 올빼미를 기다리게 되지 않겠나. 그가 차츰차츰 내 엉덩이를 수레바퀴로, 내 속에 깃든 신(神)을 말(馬)로 변화시키면 나는 거기에 올라탈 것이니, 마구를 채울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네! 더욱이 생명을 얻은 것은 때가 되어서이고, 생명을 잃는 것도 예정된 길을 따르는 것이네. 그 때에 만족하고 예정된 길을 따르면, 슬픔과 즐거움이 그 속에 끼어들 수가 없다네. 이것이 바로 ‘속박으로부터의 풀려남(縣解)’이라고 부르던 것일세. 스스로 풀려날 수 없는 자는 다른 사물들이 더욱더 단단히 옥죈다네. 피조물들이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네. 그러니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이 몸은 죽으면, 아마도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되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나타날 것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돌고 돈다. 하지만 마음은 어떤가? 이 몸이 죽으면, 마음 역시 사라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마음은 피리가 텅 비어 있으면서 소리를 내듯, ‘인연’이 만든 ‘도의 작용’이다. 마음은 꺼내어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몸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는 것 같지만, 정말 그러한가? 어떤 구멍이든 바람이 통하면 소리가 난다. 어떤 존재이든 그 조건이 맞으면 마음의 작용이 난다. 사실 구멍의 재질이 아니라 그 이치가 본질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그 정신(精神)이 본질이다. 마치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처럼, 정신은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초월적 실재이다. 그래서 죽음은 모양의 변화일 뿐이다.

/3대결산총회준비위

[2022년 1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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