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교무
김도영 교무

[원불교신문=김도영 교무] 소태산 대종사 대각 후 “종사주님! 종사주님!” 하며 따르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소태산 대종사에게 이적을 기대했다. 

인간으로서는 하기 힘든 뛰어난 술법의 신통묘술(神通妙術), 또한 이적(異蹟)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했다. 이를 통해서만 소태산 대종사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으려 했다. 그들에게 소태산 대종사의 메시지, 성불은 1순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1순위는 신통이었다. 그러니 소태산 대종사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소태산 대종사가 제시한 성불의 문은 달랐다. 인도상의 요법을 가르침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통을 귀하고 신비하게 알지 않는다. 신통이 세상을 제도하는 데에 도리어 폐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는 옛 성인의 말을 빌려 ‘신통은 말변의 일’이라 했고, ‘도덕의 근거가 없이 나타나는 신통은 일종의 마술’이라고 했다. 그리고 “혹 신통이 나타나 함부로 중생의 눈에 띄어 정법에 방해될까 조심하라”는 법문도 내렸다.

깜짝 놀랄 일이다. 소태산 대종사만 따르면 신기한 이적도 나투고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입는 것도 줄여라, 먹는 것도 줄여라, 마시는 것도 줄여라 하니 사람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참된 자아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무는 곳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를 세운 예수도 그랬다. 예수가 말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에게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손을 저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 21절)고 했다.

지금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도식적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하나같이 “주여! 주여!” 하며 예수를 따른다. 그렇게 따르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이미 자신의 이름이 박힌 천국행 티켓이 예약돼 있다고 믿는다.

불교에도 그런 문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름은 ‘불이문(不二門)’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조건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둘이 아니어야 한다. 차안(此岸, 속세의 땅)과 피안(彼岸, 깨달음의 땅), 그 둘의 속성이 통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불이(不二)’의 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들에게 왜 신통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이유가 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고 말한 예수처럼 ‘사람’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열어야 할 성불의 문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열쇠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문을 여는 열쇠를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여는 방법을 제대로 모른다. 아니, 자신이 열쇠를 가진 줄 모르기도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참된 자아를 만나게 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그 문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바로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번뇌의 꽃이 수백 수천 번씩 지다가 피고, 피다가 진다. 그러니 늘 번뇌 속에서 어둡고 괴로운 길을 가고 있다. 참된 자아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무는 곳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성불의 세계’ 임을 자각해야 한다.

/삼동인터내셔널

[2022년 1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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