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관 교도
여도관 교도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는 1956년 한국의 첫 방송국 HLKZ-TV가 개국한 후 방영된 15분 길이의 <천국의 문>이다. 죽은 좀도둑 두 명이 천국의 문 앞에서 서로의 인생을 돌아보며 대화하는 내용이다. 

이 드라마는 당시 한국 사회가 갈구한 욕망과 당면한 문제를 다뤘다. 전쟁이 끝나고 어려웠던 삶 속에 좀도둑으로 밖에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을 통해 결국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권선징악 정서와 국가 재건의 희망을 드라마라는 문화적 도구를 이용해 계몽했다. 

반세기가 지나 2000년에 들어서며 약진하던 K-콘텐츠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글로벌 주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오징어 게임>으로 대표되는 K-드라마의 부상은 유럽이나 미국에선 학문적으로 규명하려 시도 할 정도로 일시적 유행이 아닌 지속적 현상이 되었다. 해외에서는 K-드라마가 파편화된 개인의 적자생존, 승자독식, 물질숭배 등 현대 자본주의가 낳은 모순적 주제를 새로운 스타일로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재벌가의 비서로 머슴처럼 살았던 주인공이 음모에 빠져 죽임을 당하지만, 그 집안의 막내아들로 환생하여 복수와 부를 상속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우연히 얻은 금수저를 이용해 우리나라 최고 재벌기업 회장의 2세인 친구와 운명을 맞바꿔 살아가는 이야기.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재벌집 막내아들>과 <금수저>의 스토리다. 이 두 드라마도 앞서 언급한 K-드라마의 성공 문법을 따라가고 있다. 
 

인과는 운이 아니고 
과보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다만 색다른 지점은 기존 드라마들은 주인공이 온갖 고초를 극복하고 맨주먹에서 성공하는 서사가 주를 이루었다면, 요즘 드라마는 초자연적인 주술적 힘에 의해 이미 다 갖춰진 성공한 삶으로 인생을 바꾸는 스위치 판타지라는 것이다.

갑자기 얻은 부와 권력이 손 안에 있고 다가올 미래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를 성공으로 반전시키는 주인공의 활약은 통쾌하기 그지없다. 반면 이런 드라마는 전개 과정 중간 중간에 변신 전 자신이 겪었던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보여주고 그런 어려운 환경에도 사랑하고 화목했던 가족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물질적 풍요와 대비되는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로 보인다. 하지만 공허한 풍요와 고통스런 빈곤이 교차하는 장면에서는 그 격차를 빚어낸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드러내기보다는 불행을 초래한 개인의 선택을 부각시킨다. 이런 표현 방식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해 씁쓸하다.

드라마는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고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대중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인생 ‘리셋’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정서가 저변에 깔려 있다. 우리 청년들은 IMF 국가부도사태 이후 점점 고착화된 계층 간의 위계에 대해서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 정의하고 스스로를 ‘N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를 포기한 세대)라 부르며 자조한다. ‘이생망’과 ‘N포세대’는 치열한 경쟁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MZ세대식 푸념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내일을 예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판타지를 통해 내일을 포기한 상실감을 위로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오래전부터 쌓여온 사건들과 인연과보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운이 아니고 과보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작은 희망들이 쌓인다면 이번 생애 안에도 저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방송협회 기획심의부장·강남교당

[2023년 1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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