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관 교도
여도관 교도

[원불교신문=여도관 교도] 2022년 7월 미국항공우주국은 인류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우주를 공개했다. 별이 탄생하는 순간이 담긴 용골자리 성운, 별이 죽어가는 모습의 남쪽고리 성운, 처음 발견된 밀집 은하군 스테판의 5중주 소은하군 등 제임스웹 우주망원경 덕분에 인류는 우주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가졌다. 제임스웹은 태초의 별을 관측하여 우주의 탄생과 기원을 밝힐 수 있는 과학적 증거를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지구에서 150만㎞ 떨어진 우주로 올려졌다.

무한히 확장된 우주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는 성운들 사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공(空)을 응시하고 있자니 경이로움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며 과연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제임스웹의 중력 렌즈는 131억 년 전 우주 태초의 빛도 포착했는데, 131억 년을 인간의 일생에 비례하면 우리는 천수를 누려도 20여 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을 산다.

인류는 고대문명을 이룩한 때부터 하늘을 관측해 태양, 달, 별의 움직임에서 규칙을 찾으려 애썼다. 별빛은 파종하는 때와 홍수와 가뭄을 알려주는 시계였고, 망망대해의 항해자와, 사막 한 가운데를 지나는 여행자의 나침반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시대는 종교가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공포의 대상인 자연현상 배후에 인간이 결코 읽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무엇이 존재 한다는 두려움은 인간을 전지전능한 신에게 의지토록 하는 것을 넘어 생사까지 맡겨버렸다. 이런 이유로 세계적인 종교의 위기는 과학과 물질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 마음엔 교법이 있다. 
이제 교법을 들고 
내 안의 우주를
탐험하러 떠나자.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반목하고 대치해왔지만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다. ‘진리를 향한다는 것.’ 인간과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이치로 움직이는지 밝히는 것이 종교와 과학의 지향점이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과학을 신앙의 현실적 위협으로 간주해 지동설 같은 천문학과 진화론 같은 생물학이 성경의 절대진리를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에 반하는 과학적 주장은 목숨을 걸어야 했고, 종교재판에서 희생되지 않기 위해 물리적 증거는 ‘참’이어야 했다.

이런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 근대 서양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지동설의 시조인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자이기 전에 가톨릭 신부였다. 교황청에서 지동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지동설 발표 후 440년이 지난 1992년이니 종교적 도그마(이성적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교리)의 생존력은 참으로 끈질기다.  

<사피엔스>로 문화인류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유발 하라리는 후속 작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은 유전공학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영생을 꿈꾸며,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노동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신이 되려한다”고 진단했다. 이에 미래의 종교는 더 이상 신에게 종속되지 않고 신성의 영역을 자신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새로운 종교적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라리는 이를 ‘인본주의 혁명’이라고 정의하고 많은 종교를 언급했지만 원불교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세계적인 석학이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알게 된 것을 소태산 대종사는 100년 전 깨달았다.

제임스 웹이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새로운 은하를 빚고 있는 신의 손가락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물질개벽을 보면서도 정신을 개벽하여 내 안의 우주에서 각자의 신성을 찾는 것을 게을리한다면, 기술문명도 따라잡지 못하고 물질에 휘둘리는 인간이 될 것이다. 저 하늘에 제임스웹이 있다면 우리 마음엔 교법이 있다. 이제 교법을 들고 내 안의 우주를 탐험하러 떠나자.

/한국방송협회 기획심의부장·강남교당

[2023년 2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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