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평생 살면서 항상 좋기만 하다거나 행복하기만 하다는 이 있으면 손들어 보라. 혹, 손 든 이가 있다면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한 상황이니 속히 병원에 들러 보길 권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호락호락하지 않는 법, 울고 웃는 일들이 섞여 돌아가기 마련이라 괴로움은 누구든 겪어야 한다. 남이 행복하다는데 굳이 괴롭게 만들려는 심보를 가진 건 아니다. 다만, 윤회의 고통을 멈추도록 각성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들 하시라.

보라. 인간에게는 생·노·병·사라는 사고(四苦)가 태어남과 동시에 숙명으로 따라붙는다. 제아무리 태어나지 않으려 해도 그냥 태어나 진다. 늙지 않으려 하나 늙어가며, 병고를 겪지 않을 수 없으며,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나는 그래도 괜찮노라 계속 고집할까 봐 네 가지 괴로움을 더 보태 일러줘야겠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죽음으로든, 이별로든,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은 어떻던가. 그 반대로, 원증회고(怨憎會苦), 보기 싫거나 날 힘들게 하는 이들을 계속 만나야만 하는 고통은 더 크지 않던가. 거기에 구부득고(求不得苦),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어났으면, 혹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 때는 또 얼마나 많던가. 오음성고(五陰盛苦), 온갖 번뇌, 싫은 이미지나 생각들이 치성하게 떠오르는 괴로움을 겪지 않고 사는 이가 어디 있던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뭐 하러 이런 말을 꺼내 사람 마음 심란하게 하느냐고 투덜거릴지 모르겠다. 이 모든 고통을 천생 만생 억만 생을 반복하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자유, 해탈, 극락으로 안내하려는 안타까운 외침으로 여겨주면 좋겠다. 그 전제조건은 깨달음을 얻는 일인데, 이 기적 같은 능력은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져 있다. 쉽게 다시 요약하면, 영생토록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그것은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말씀.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려면, 
그 급선무가 
사람 몸 받았을 때 견성,
즉 깨달음, 눈앞에 훤히 밝은
이 마음을 보는 일이다.

흔히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이런저런 마음공부에 수십 년씩 공을 들인다. 듣기에 심히 당황스럽고 불편할 테지만, 마음이 어딨는지 확실히 보지 않은 이는 엄밀히 말해 마음공부가 불가능하다. 마음을 모르니 비울 수도, 닦을 수도, 돌릴 수도, 다스릴 수도 없다. 

마음을 확실히 본 이후라야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 마음 있는 곳을 정확히 확인 못한 이들이 마음공부 한다고 하는 일체의 노력은 심히 가상하고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 약간 훌륭한 일이긴 해도 너무 고되고 딱하고 허망한 일이다. 눈 뜬 자의 위치에서 보면, 눈 어두운 이가 눈 뜰 생각은 않고 똑같이 눈 어두운 이들을 이리 와라 저리 가라 인도하는 딱 그 격이다. 

이런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려면, 그 급선무가 사람 몸 받았을 때 견성, 즉 깨달음, 눈앞에 훤히 밝은 이 마음을 보는 일이다. 마음을 본 이들은 남들은 다 괴롭다고 몸부림하는 일들을 그저 바람 불고 비 오는 정도의 현상으로 수용하며 초월한 차원에서 사는 길을 안다. 사람으로 태어나 깨달음 얻지 못하고 그냥 떠나면 또 사람 몸 받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깨달음, 그거 얻으면야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쉽나, 그게 아무나 되나,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까 싶어 이 자리에서 확실히 못 박아 둘까 한다. 그렇다! 깨달음은 쉽다! 아무나 된다!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도 완벽히 가능하다. 자, 그러니 이제 함께 출발해 보지 않을 텐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1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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