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박윤호 교무] 원기3년(1915) 10월, 소태산 대종사는 새 회상의 창립 한도를 발표하고 “앞으로 회상의 대수(代數)는 기원 연수(紀元年數)로 구분하되, 매대(每代)를 36년으로 하고, 창립 제일대(第一代) 36년에 한해 이를 다시 3회(回)로 한다”고 했다. 이후 새 회상 원불교의 교세는 확장일로를 거듭하여 개교 반백년 즈음에는 교도와 신도 도합 60여 만명, 출가교도 1천여 명, 교당 18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른바 사오십년 결실의 성과였다. 

이 시기 삼순일 법회와 계몽운동을 겸한 교화 접근 방식은 농업경제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특히  주요 선진들의 교리강습회가 지방에서 열리는 날에는 해당 지역의 축제와 마찬가지로 인산인해를 이뤄 알뜰한 교당 주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곤 했다. 이러한 단기선과 강습회는 동하(冬夏) 3개월 선 실시가 어려운 현실을 감안한 정산종사의 방편이었으며 이는 예전(禮典)에 연례법회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후 대산종사 재위 때는 연원교당 불리기 운동을 통해 도시화와 산업화 흐름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왔다. 실제로 이 시기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나 교도 자녀들을 만나보면 가까운 교당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았다거나, 고달픈 도회지의 타관살이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원불교 간판이 반가워 발길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삼순일 법회에서 일요예회로 전환되고, 방석에서 장의자로 변화하던 시기. 당시 높은 금리와 부동산 가격 폭등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빚을 내 교당 건물만 확보하면 어떻게든 해결해내는 근성의 교역자들과 산업화 역군이었던 7080세대가 합작해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다. 
 

시대 변화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며 발전해 온 원불교,
종교인구 감소시대에 맞는
변화 모색 시급.

흔히 이러한 교단의 고도성장은 다른 노대종교의 발전상과 자주 비교된다. 불교는 여래 멸 후 백년 즈음에 이른바 교단의 근본분열로 시작된 부파(部派)불교가 열려가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것은 기원 후 3백 년이나 지나서였고, 그 이전의 기독교도들은 원형경기장의 사자밥으로 던져지기 일쑤였다. 

이에 비하면 백 년을 지나 3대를 마무리하는 현재 원불교는 몹시 압축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대중 속에 자리를 잡아왔다. 원기105년에 이르러 원티스 등록 누적 교도수는 40만 명을 넘어섰고, 감소세로 돌아섰다고는 하나 전무출신 수는 2087명을 기록했다. 교당수는 국내외 도합 588곳에 이르고 기관은 203곳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위기를 논하고 있다. 107년의 역사 속에 위기가 없었던 시절은 없었으나 지금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사회로의 전환에 손쉽게 적응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후유증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전 세계에서 관찰되는 무종교인의 증가가 심상치가 않다. 우리나라 무종교인의 비율은 21세기 초부터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즉 대중들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특히 이같은 경향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진다. 대한민국 20대 5명 중 4명은 종교가 없고, 30대 역시 70%, 40대 68%로써 무종교인 비율이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청년시절 설교를 들을 때 ‘소태산 대종사는 이미 99개의 종교가 있는데 100개 채우려고 원불교를 만드셨는가, 아니면 99개 종교를 모두 완전하게 하려고 나오셨는가’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것은 아마도 지난 세월 소수인의 편벽됨에 머물렀던 종교의 가르침을 광대하고 원만하게 전환시켜야 하는 원불교인들의 책무를 강조한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바야흐로 교화의 겨울이다. 깊은 어둠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곧 다가올 새벽을 맞이할 변화 의지를 준비하고 점검할 때다.

/김화교당

[2023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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