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원 교도
이준원 교도

[원불교신문=이준원 소장] 꽃 피지 아니한다 그 누가 말하던가/제각기 피는 시절 다르지 아니한가/다른 꽃 피온 후 슬며시 피오리다. 

대산종사 이르길, 모든 일에 다 때가 있으니 때 이르게 피면 시들고 마나니, 자기 일이 아니어든 나서지 말라시며, “때가 아닐 때 드러나려 하면 자기 일도 안 될 뿐 아니라 큰일도 그르치게 되느니라”고 했다(운심편 32장). ‘중용(中庸)’의 중은 시중(時中), 때에 맞추어 처신하는 것이다. “때가 멈추면 쉬었다 가고, 때가 이르면 나아가 행하면 된다(시지즉지 시행즉행 時止卽止 時行卽行).”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not too early, not too late) 그때란 언제인가? 말하고 싶을 때, 행하고 싶을 때 세 번을 참아야 한다. 참고 또 참고 참아 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소태산의 삶은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의 연속이었다. 마당바위에서나 노루목에서나, 숯장사와 엿장사 할 때나, 만덕산에서나 송대에서나, 열반하시기 전까지 한결같이 제자와 후대를 위한 마음이었다. 1920년이 지나 경찰통치가 심해지고, 좌우 사상 대립이 일어나던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돈관리와 남녀관리는 물론이고, <정전> 저술할 적 언어 표현에도 고심하였으리라. 제자가 스승의 속살 마음을 어찌 다 알랴? 스승이 떠나신 후에 더욱 더 잘되면 보은도리(報恩道理)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법(求法)․제법(制法)․전법(傳法)은 행법(行法)을 위함이다. 제자의 행함이 없다면 글로만 머무는 경전에 불과하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시정(是正)이지 혁신이 아니다. 소태산의 가르침을 ‘시대를 따라’ 실행하여 결실을 보는 것이 혁신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 “나의 조물주는 나이고, 너의 조물주는 너다.” 소태산이 숙겁의 인연을 만날 적마다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 뜻은 무엇일까? 

소태산 재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이 혼란스럽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상상이 현실화되는 ‘초초초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로봇과 생체공학,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융합(融合)으로 아바타가 현실화되는 ‘초(超)과학의 시대’다. 인터넷,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로 세상이 바로바로 연결되는 ‘초(秒)소통의 시대’다.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 등 날마다 새로운 체험을 하는 ‘초(初)체험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솔로몬연구소

[2023년 3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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