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진 교무
송상진 교무

[원불교신문=송상진 교무] 하루하루를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며, 껍데기뿐인 삶을 피하고자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소태산 대종사님의 예측대로 과학문명이 나날이 발전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놀라운 디지털 문명에 어느새 우리의 혼을 빼앗겨 온갖 외부 소식 따라 흘러가 버리게 될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관심과 성향을 파악한 AI가 클릭과 클릭 사이에 무언가 끊임없이 구매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컴퓨터 화면 앞에서 보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바쁜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통한 근본적 해소는 아니더라도 예술활동이 하나의 대치의 수단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소박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는 휴식이 필요할 때면 가끔 미술로 피난을 떠납니다. 어렸을 때 화가셨던 어머니의 캔버스 앞에 앉아서 ‘왜 어머니는 하늘에 붉은색과 주황색 음영을 더할까’하고 궁금해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늘의 색깔은 흰 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다 비슷한 요소가 있지만 특히 저는 미술이 호기심과 동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강한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비록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미술에 대한 사랑만은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갤러리에 가면 ‘디지털 시대에 대안적인 공간에 들어온 듯한’ 신성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 미술은 참을성 있고 겸손하게 주변 환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조율해 줍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일원상을 바라봅니다. 
집중력도 길러지고 
얼굴에 미소도 짓게 되며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미술뿐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은 우리 내면의 숨겨진 부분이 잘 드러나도록 하고, 감성을 풍부하게 하며, 도덕적 정서가 안착되는 효과를 줍니다.

상산 박장식 종사님의 책 <평화의 염원>을 감동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서정비 못지않게 예술교화면도 계발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임과 동시에 감성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 한 줄이 나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성적 이해에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지만 예술은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진동시킬 뿐 아니라 아주 깊은 곳까지 전달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상산종사님의 이 말씀은 우리 교화 방향에 있어 비교적 소외되었던 분야를 크게 부각시키는 중요한 지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근대미술 작품들 중에서도 프리다 칼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에드워드 호퍼 또는 잭슨 폴록과 같은 화가들은 철저하게 내면의 경험을 완벽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예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은 또한 더 깊고 더 밝게 볼 줄 아는 사람의 안목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가장 유명한 원불교 작품 중 하나는 대산종사님의 일원상 작품일 것입니다. 그 작품은 필시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남중리 소나무 아래 땅바닥에 그리셨던 소태산 대종사님의 동그라미가 효시가 될 것입니다. 그 한 획을 통해서도 우리는 순수한 하나됨, 모두의 공통된 인간성, 그리고 진정한 본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주는 힘을 얻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모두 인과가 적용되고 생사가 있지만, 이 동그라미에는 인과는 있어도 짓는 자와 받는 자가 본래없고 변화가 있을 뿐 생사는 본래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일원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집중력도 길러지고 얼굴에 미소도 짓게 되며 좋은 생각도 떠올라서 사람들과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예술은 서로를 공감으로 소통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면서 내면으로 빛을 되돌리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3년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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