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여기저기서 봄꽃들이 툭툭 꽃망울을 터트리며 마음 설레게 하는 시절이다. 어떤 분이 단단한 땅을 뚫고 올라온 수선화 새싹을 보며 이것이 바로 위대한 진리의 작용이라고 신기한 듯 말한다. 수선화 새싹이 위대한 진리 작용인 것은 알면서 당신의 움직임은 위대한 진리 작용 아니냐고 되물으니 무슨 말인지 몰라 벙찐 얼굴로 바라본다. 꽃만이 아니라 인간인 그대, 돌맹이, 허공법계 일체 만물 먼지 하나도 빠짐없이 위대한 진리의 나타남이며 작용인 것을….

우주 만물과 허공 법계를 성주괴공 춘하추동 생주이멸 생노병사하게 만들며 일시에 운영하는 어떤 위대하고 어마어마한 힘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원, 진리, 법신불이라고 부르고, 다른 곳에서는 신, 하나님, 천주님, 천지신명, 부처, 알라 등등 다양하게 이름을 붙여놓았다. 어떤 이름도 어떤 상징도 이 자체는 아니다. 단지 이름일 뿐이다. 이름이나 상징 말고 그 자체를 절절히 느끼고 궁구하여 궁극에는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언어로도 이것 자체를 설명할 길이 없고, 언어나 상징이 그 자체는 아니니 언어도단,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다. 이름하여 일원이며 진리이며 신일 뿐이다.

다시 그 세계로 계속 들어가 보자. 당부컨대, 제발 머리로 이해 말고 실제 그 자리가 드러나도록 따라오라. 머리로 진리 논하기를 즐기는 이들은 엉뚱한 것을 붙잡고 옳다고 고집부려 깨닫기 어려운 가련한 중생인데, 아무리 호통쳐도 본인에게 하는 줄을 모른다. 지혜로운 그대는 텅 비워 오롯하게 느끼며 오라. 
 

일체 만물이
법신불 아님이 없다.
허공을 통해 
일체 기질은 하나로 이어져
한 몸, 법신불이다.

그럼, 일원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는, 신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디에나 있다. 모든 곳에 가득하게 있다. 편재해 있다. 무소부재하다. 없는 곳이 없다. 없는 곳이 없다는 이 말을 항상 기억하라. 없는 곳이 없다면 일체 만물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먼지 하나에도 가득하다는 뜻이다. 어느 털끝 하나도 비켜가지 않고 가득하다는 뜻이다.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의 본의를 꿰뚫어야 한다. 없는 곳이 없으려면 일체가 텅 비어 있어야만 이 말이 가능하다. 어느 작은 알갱이도 물질 상태로 견고히 있다면 무소부재하지 않게 된다. 일체가 텅 비어야 없는 곳이 없음이 성립된다. 일체는 진리적인 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텅 비어있다! 일체는 본질적으로 물질이 아니며 텅 빈 에너지만 있다. 텅 빈 우주에 진리, 신, 법신불, 하나님이 무소부재하게 가득찬 상태로 만물을 운영한다. 

일체는 다 텅 비어있으며, 온 우주가 통으로 텅 비어있다. 통으로 텅 빈 것이 우주에 가득하여 어디에서도 단절되거나 잘라짐이 없다. 온 우주는 텅 빈 한 몸이다. 텅 빈 한 몸, 진짜 몸, 법의 몸, 하나로 있는 이 텅 빈 몸을 법의 몸, 즉 법신불(法身佛)이라고 부른다. 일원은 법신불이다. 법신불은 따로 어디에 있지 않다. 일체에 가득하다. 법신불 아닌 것이 없다. 일체 만물은 법신불의 구성요소, 비유하자면 법신불의 세포다. 세포의 기질은 허공과 물질과 유정물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허공을 통해 일체 기질은 하나로 이어져 한 몸, 법신불이다. 법신불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핵심이다. 

법신불, 진리, 하나님, 신, 일원,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우주만물 허공법계 일체가 법신불 아님이 없다. 그러니 똥막대기라 해도 꽃한송이를 들어도 뜰앞의 잣나무를 지칭해도 허공을 가리켜도 일체가 다 법신불 아님이 없다! 수선화 새싹이나 그대나 위대한 법신불 진리작용 아님이 없다니까요.

/변산원광선원

[2023년 3월 1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